[펌] '서운함' 놓으시고 고이 잠드시길- 손낙구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연세가 이미 고령이시어서 어느 정도 짐작도 했고, 무엇보다 별다른 기억이 없거든요. 97년 대선 당시에는 중학생이어서 정치에는 완전 관심 없었고,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도 몰랐거든요. 심지어 광주 민주화 항쟁도 몰랐으니.... 그리고 대학 들어갔을 때는 이미 노무현 시대. 그때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이어서 집권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고 기억나는 건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정도. 아무튼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알게 된 건 20대에 들어와서도 몇 년 후의 일이었네요.

 

손낙구 씨의 좋은 추모글을 봐서 올려봅니다. 공은 잇고 과는 넘어서야겠죠. 그럴려면 실력도 더 키워야겠고요. 자신이 믿고 있는 길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원문 링크(http://blog.ohmynews.com/balbadak/293812)

 

 

'서운함' 놓으시고 고이 잠드시길

- 고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


생전의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 노벨평화상에 얽힌 노동계와 대통령 사이에 드리워진 ‘서운함’이 떠오른다. 얘기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 난 민주노총 대변인을 맡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는 일이야 경사이며, 남북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살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충분히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란 점에서 노동계도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그 당시 정부가 많은 노동자들을 구속 수감하는 강경한 노동정책을 편 탓에 노동계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집권 이후 외환위기 극복을 명분 삼아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는 등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속 수감했다.


취임 첫 해인 1998년에만 219명을 구속하는 등 노벨상 수상 당시까지 구속 노동자가 400명이 넘어서 전임 김영삼 정권 때 보다 더 심각했다. 2000년 상반기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호텔롯데 여성 노동자 파업 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이 같은 목소리는 노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민주노총을 포함한 각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공동으로 김대중 정부에게 사회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강도 높게 촉구했고, 이에 침묵하는 정부에게 기본인권을 탄압한다면 노벨평화상 수상 자격이 없는 것이라거나 노벨상을 반납하라거나 하는 식으로 강력히 항의했다.


정부가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자 목소리는 더 커졌고 시민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연 어느 기자회견 자리에선가 ‘정부가 계속 침묵한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얘기까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 행사장 근처에서 한국인 한 사람이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피켓시위를 했고, 외신 기자도 한국 내 인권상황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비판적 질문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피켓시위를 한 사람은 현지 교포로 민주노총이나 그 어떤 사회단체도 오슬로로 대표단을 파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실 민주노총은 노벨상 수상에 즈음한 성명서를 하나 냈을 뿐 이와 관련한 별도의 독자적인 입장을 밝혔거나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노동인권을 제대로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진의였지, 더 나아가서 노벨상 수상을 반대해야 한다고까지 생각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변인으로서 민주노총 공식 입장을 밝히는 통로를 맡았던 필자는 이 이슈로 ‘오버’하지 않기 위해 정교하게 관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까닭에 그 뒤 이 일은 잊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02년 말 김대중 대통령 퇴임 때까지 이 일은 김대중 정부가 노동운동이나 민주노총을 대하는 데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2001년 터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와 경찰병력 투입 사태를 비롯해 그 뒤로도 김대중 정부와 노동계의 관계는 더 악화됐고, 정부가 단병호 위원장을 구속 수감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더 덧났다. 정부는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일도 끝까지 ‘발본색원’하는 일이 많아졌고, 임기 동안 모두 892명이나 구속하는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물론 이는 노동정책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하위 개념으로 취급해 치안정책의 하나로 치부한 김대중 정부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문제를 풀려고 할 때마다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 데 대해 윗선에서 서운해 하신다”는 얘기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어이없는 얘기가 되풀이 되길래 정부 관계자에게 “도대체 누가 그런 보고를 했느냐. 정확한 사실이 아니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한 번 ‘잘못된 팩트’로 보고된 내용은 바로잡히지 않았다. 필자가 느끼기에 그 뒤로도 이 일은 김대중 정부가 민주노총이나 노동계를 대할 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


심지어 퇴임한 뒤인 2006년 당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상 받으러 노르웨이 오슬로에 갔더니 민주노총이 반대 운동을 했다”며 “매우 서운했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운한 이야기’의 사실 관계는 여기까지다. 사실 서운한 마음으로야 필자를 비롯한 노동계도 뒤질 게 없다. 마음이란 게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 맞선 세월이 있고 그 때의 판단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랬다’ 정도일 그깟 일을 지금 와서 미주알고주알 한다고 해서 서운함이 풀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더 돌아보고 생각해보고 충분히 더 이야기할 게 남아있는 세월인 것만은 틀림없단 생각에서 독백처럼 돌아본 것이다.


‘평화와 인권을 사랑하는 노벨상 대통령’ 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많은 노동자를 구속하는 대통령’의 상황처럼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빛깔의 느낌이 난다.


노동정책이나 부동산 정책처럼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와 투기경제를 오히려 부채질한 점에서 혹독한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해방전후사’ 만큼의 무게가 나가는 ‘IMF외환위기 전후사’가 필요할 만큼 격변기에 김대중 정부의 선택이 어떤 역사적 결과를 빚었는지 특히 경제사회정책 분야에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다른 빛깔도 눈부시다. 필자는 중학교 때 신문배달을 하다 잠시 쉬면서 펼친 지면에 아로새겨진 흑백 사진 속 ‘양심’의 상징 김대중을 잊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할 것 같은 잘생긴 얼굴, 납치와 고문 그리고 사형선고, 5.18 광주민중항쟁….


치떨리는 노여움에 서툰 백묵 글씨로 남 몰래 쓰던 민주주의의 얼굴 김대중. 마침내 온갖 역경을 딛고 선 ‘인동초 대통령’이 되어 획기적인 민족화해를 이뤄낸 사람. 국민들에게 ‘그래도 어디에 내놓을 만한 대통령다운 대통령 한 명’은 갖게 해준 사람.


이 모든 빛깔이 그 시대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이리라. 이 점은 노무현 대통령도 다르지 않으리라. 민주정부 10년을 책임진 대통령 두 분이 서거하고 바야흐로 한 시대가 가고 있다. 민주정부 10년의 한계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뛰어넘을 것인가가 큰 과제가 되고 있다.


공과가 있게 마련이니 공은 잇고 과는 넘어서야 하리다. 그러나 과를 비판하기는 쉬워도 뛰어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솔직히 말하면 앞선 세대만큼의 공을 만들어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정부의 과를 따지기 앞서 과연 민주정부를 뛰어넘을 의지와 실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돌아볼 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공을 남기기 위해 자신이 만난 시대를 얼마나 치열하고 성실하게 마주했으며 남기고 싶지 않았을 과는 왜 남게 되었는지, ‘서운함’을 넘어 서로 이해하고 고개 끄떡 일 수 있도록 충분히 힘써야 할 책임은 남은 우리 몫이다.


86년 동안 영욕의 한국 현대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최선을 다한 김대중 대통령 영전에 ‘서운한 마음’ 내려놓으시고 고이 잠드시라는 뜻에서 국화꽃 한 송이 정성스레 바친다.

by sonofspace | 2009/08/20 15:14 | 생각 | 트랙백 | 덧글(0)

쌍용자동차 투쟁을 지켜보며

 

쌍용차 투쟁이 끝났다. 노조는 패배했다. 정리해고는 막아내지 못했다. 파업 인원 중 48퍼센트만이 무급휴직으로 구제됐다. 나머지는 떠나야 한다. 그리고 이미 2천여 명의 노동자가 희망 퇴직을 선택했다. 전체 7136명의 노동자 중 37퍼센트인 2646명을 줄이려던 사측의 계획은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얼추 달성되었다. 테이저 총이라는 신무기를 동원한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과 이기주의라고 매도하는 여론에 쌍용차 노조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최후의 48퍼센트 안의 타협은 사실상 항복선언처럼 보였다. 위안은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패배만은 아니다. 70일 넘게 공장을 점거하면서 노동자들은 단결된 힘을 보여주고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냈다. 만약 앞으로 어떤 기업에서 경영 방침의 실패이든 주식 투자의 실패이든 간에, 모종의 사정으로 재정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노동자의 반발을 우려해 손쉽게 정리해고를 선택하지 못한다면 그건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런 일이 있었을 때 기업이 쉽게 정리해고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게 된다면 그건 쌍용차 투쟁이 패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쌍용차 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의 힘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었으며, 향후에 노동과 자본 모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글은 쌍용차 투쟁과 파업을 둘러싼 여러 논쟁에 대한 나 스스로의 정리이다.


한국의 노동계는 얼마나 강한가

지금은 아무리 보수적이고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사람도 노조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조중동 같은 보수지들도 항상 노동자를 위하는 듯한 논조를 취한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강성'노조이고, '귀족'노조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강성노조는 무분별한 파업과 폭력성으로 기업들의 투자와 생산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비정규직 같은) 다른 노동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한국 사회의 악의 축 같은 존재이다. 한국 강성노조의 무서움은 외국에까지 널리 잘 알려져 있어서 외국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를 꺼리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국내 기업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기까지 한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강성노조로 인한 기업과 사회의 피해가 막대한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없어져야 하고, 마치 테러리스트와 같은 이들과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며,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이런 내용을 다룬 신문 기사와 주장들을 보며 항상 의아스러운데, 과연 한국의 노조가 정말로 그만한 힘이 있는가? 이런 주장에 따르면 정말 한국의 강성노조들은 사회를 마비시킬 만한 엄청난 힘을 지닌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로는 한국의 노동 세력은 부끄럽지만 약하기 이를 데 없다. 민주노총이 매번 총파업 어쩌고 하며 궁시렁 되지만, 그런 총파업 위협이 실현할 수 없는 '뻥'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민주노총에 사회를 마비시킬 만한 그런 역량은 없다. 이번 역시도 노동계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금속노조의 약간의 연대가 있긴 했지만 현대차나 기아차 노조는 동조 파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인데도 말이다. 그나마 자동차 노조가 가장 잘 조직돼 있고, '강경한' 노조인데도 이렇다.


한국 노동계의 현실은 수치로도 분명하다. 2008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고작 10.5퍼센트밖에 안 된다. 유럽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보다도 월등히 낮고 미국보다 다소 낮다. 87년 이후 90년대 초까지 상승하던 조직률은 그 후로 쭈욱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단지 수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바마는 작년 대선 시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표를 의식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었으며, 자동차 노조를 의식해 한미 FTA의 자동차 협상을 다시 할 듯한 제스처도 취했다. 또한 당선 후에는 퇴직 수당을 요구하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 역시 자본가의 편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오바마의 노조에 대한 발언은 확실히 우리와는 비교된다. "강한 노조가 없다면 강한 중산층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노동자와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활동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링크)" 보면 화가 나지만 참고 삼아 우리 대통령 각하의 발언도 살펴보자. "태안 기름유출 사고 현장에 1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왔다 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노사분규가 심한 기업체 노동자들이 저렇게 자원봉사하는 기분으로 자세를 바꾼다면 그 기업이 10% 성장하는 게 뭐가 어렵겠느냐.(링크)" 그렇다, 우리 대통령 각하는 노동자는 '자원봉사'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일해주시길 바란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심지어 노동자 자신조차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양국 대통령의 발언은 두 나라가 노조를 대하는 자세와 노조가 차지하는 위상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의 대통령은 노조를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10퍼센트밖에 안 되는 조직률에, 그마저도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정당에 충실히 투표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바로 저런 대통령 후보를 양대 노총의 하나가 지지하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파업이라도 할라치면(물론 하기도 힘들지만), 불법이다, 정치파업이다, 귀족노조다, 온갖 비난들이 빗발친다. 그것도 정권과 자본가층이 아닌 자칭 '선량한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말이다. 그렇게 노조는 늘상 고립되고 탄압받아 패배하기 일쑤이며, 노동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보다는 패배하거나 흐지부지 끝났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99년과 2004년의 지하철노조, 2004년의 LG 칼텍스, 화물연대 같은 굵직한 사건을 비롯한 크고 작은 패배의 기억들). 난 도무지 한국의 강한 노조가 문제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노조가 두려워 투자 못한다는 기업

난 노조 때문에 투자 못한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어도 정확히 어떤 기업이 그래서 투자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다. 정말로 노조 때문에 투자를 못하겠다는 투자가의 발언을 찾고 싶어서 몇 시간 동안 검색을 해봤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보수 언론지의 사설이나 전경련 대표, 경제 연구소 등은 그렇다고 말하는데, 정확한 '사례'는 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일보의 다음 기사를 보자. 외국인 직접투자, 한국 외면 이라는 제목에 OECD 30國중 한국만 3년연속 투자 줄어 "강성 노조·규제 많아 투자 검토했다 철회"라고 소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나 기사 내용은 좀 많이 다르다. 기사에 따르면 "R사가 한국 시장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공장 부지가격이 투자비의 20%에 달할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성노조 운운은 기사에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이 꼽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정론지라면, 높은 부동산 가격이 외국인 투자를 막는다며 걱정해야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신문은 그러지 않는다(이유가 뭘까?)


강성노조 운운 하는 기사들은 거의 다 추측성이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외국인들의 투자가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규제와 강성노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에는 매우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물론 비싼 땅값 같은 문제도 있을 테지만 그들은 다른 이유는 도외시한 채 노조와 규제만을 문제로 꼽는다. 아무런 증명 절차 없이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를 안 한다"라는 문제에서 "옳거니 그건 한국의 강성노조 때문이야!"라는 해결책으로 도약한다. 이들은 전 세계적인 직접 투자 감소라는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노조 때문에 갈수록 기업하기가 힘들어져서 기업들이 외국으로 떠난다는 주장과는 다르게 통계는 파업일수가 꾸준히 줄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보이듯, 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 이후 파업으로 인한 노동시간 손실은 확연히 줄었다. 국제적으로 봐도 한국이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다.



 

1994년부터 10년간 한국의 1000명당 평균 노동손실일수는 90일이었다. EU 평균은 63일, OECD평균은 51일로 한국이 다소 높다. 그래프에서 그 차이는 주로 1997~2001년도에 나타나며 이전까지는 비슷했다. 바로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정리해고 등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펼치며 발생한 일이다. 


이렇듯 '강성노조'는 보수 언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GM대우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해외 투자가들은 신문을 통해 한국의 뉴스를 접하지 않나. 데모하는 사진을 보게 되면서 잘못된 인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한국의 노조는 다른 국가 노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조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 GM대우도 노조와 문제가 없다. 회사 차원에서 노조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투자 계획이 있으면 먼저 노조에게 얘기를 해준다. 그리고 공동 목표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한다. 노조 반응은 매우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다."  미국상공회의소 윌리엄 오벌린 회장은 열린우리당과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의 노사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언론의 과장된 보도로 대외적으로 한국 노동계가 강성으로 비춰지고 있다"



허구헌날 강성노조, 강성노조 타령을 부르던 언론 탓에 외국 투자가들도 정말로 한국은 강성노조 때문에 투자가 어렵다고 생각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보수언론이었다! 이제부터는 국가발전을 위해 보도를 진실되게 하길 바란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쌍용차 사태를 보며, "저 봐라, 저렇게 회사 생각 않고 투쟁만 하다보니 회사가 망해가지 않느냐. 회사와 싸울 생각만 하는 노조는 문제다"하고 혀를 찬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쌍용차보다 훨씬 더 노조가 강성인 현대차는 멀쩡한지 궁금하지 않은 걸까? 아마 임금으로 따져도 현대차가 쌍용차보다 더 '귀족'이면 귀족이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차는 왜 작년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으며, 쌍용차는 거의 망해가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기업의 위기가 정말 노조의 문제인가? 작년 GM대우는 파생상품으로 1조 원의 손실을 보았다는데 대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



은폐되고 있는 갈등

다른 유형의 비판자들은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직이나 하청 노동자의 처우에는 무관심하다가 자신들의 밥줄이 달리니까 투쟁한다고 비난한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대기업 노조는 자신들밖에 모르며, 그들 '때문에' 비정규직과 하청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 노조의 기득권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  난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단, 이 주장이 대기업 노조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고 비난하지 않는 한에서만 동의한다.


2007년에 비정규직-정규직 노조 통합 시도가 무산된 적이 있었다. 당시 기아차의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도장 공장의 일부를 점거하고 원청 사용자인 기아차가 직접적인 임단협 교섭에 나서고 정규직과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이 별것 아닌 요구에 사측은 '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구사대를 동원해가며 탄압했고, 기아차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비정규직 노조와 통합하여 같이 투쟁할 것을 결의하며 파업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결국 대의원 대회에서 찬성 46퍼센트에 그쳐 통합은 무산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을 극명히 보여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비정규직 노조는 분명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현대차 노조 역시 작년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투표를 세 차례 진행했지만 모두 부결되었다.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분명 현실이고 넘어야 할 큰 벽이다. 


그러나 비록 비정규직 문제에서 정규직 노조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만약 현대차나 기아차가 정리해고를 단행하려 하고 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한다면 난 노조를 지지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몰염치하게 행동하고 어떻게 지지를 바라느냐"라고? 물론 노조는 이기적이다. 그래서 뭐? 그렇다고 해서 정리해고를 당해야 하나?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정리해고 당해서는 안 된다.


난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바라는 만큼 정규직의 고용안정을 바란다. 정규직-비정규직(또는 하청) 관계에서 정규직은 때로 사측과 연합해 상대적인 약자를 수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럴 때 난 정규직 노동자를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정규직 관계에서는 정규직이 피해자가 된다. 이럴 때는 정규직 노조의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좌파는 언제나 핍박받는 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나자렛의 위대한 이가 말했듯이. 만약 자본가가 악독한 노동조합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난 자본가의 편에 설 것이다. 


노동자/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사실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가/노동자의 대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은폐되고 있을 뿐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전체 소득 중 임금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 약 0.7에서 2003년에 0.6으로 줄어들었다. 이윤에서 노동자에게 분배되는 몫은 더 줄어들었고, 주식배당금 등의 자본소득으로 더 많이 분배된 것이다. 저렴한 노동력을 통한 더 많은 이윤 창출이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노동 세력을 무너뜨리고 노동자 간의 분열을 획책하면서 자본은 배를 불려나가고 있다. 이번 일에서 보았듯이 '귀족'처럼 보이는 대기업의 노조도 얼마든지 쉽게 버려질 수 있는 한낱 노동자에 불과하다. 


지난 몇 년간 보수언론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귀족' 노동자와 '천민' 노동자, 나아가 노동자와 실업자의 대립으로 가리려는 시도를 계속해왔고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귀족 노조'는 비판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반면 자본가는 이제는 선망의 대상이다. 한국 사회의 암적 존재는 이제 기득권을 움켜쥐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골몰하고 있는 귀족 노조이며, 이건희 같은 자본가는 이제 한국을 먹여살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노동 계급은 서로를 적대하며 서로의 손에 쥔 지갑을 노려본다. 그리고 자본가에겐 은총을 내려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노동 계급이라는 말이 불편하다면 시민, 국민, 서민 어떤 말을 갖다붙여도 상관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서부터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는 진정한 권력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밥그릇 투쟁을 넘어 정치로

노동 분쟁에서 회사측은 임금인상이라는 부분에는 상당히 관대하며 액수의 문제일 뿐 쉽게 타협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나 구조조정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완강하다. 자본가들은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안 등은 적절히 타협하면서 노동유연성의 문제는 철저히 방어하고 확대해나갔다. 노조 역시 조합원들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임금협상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비정규직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에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화'는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안다, 그건 물론 중요한 일이다. 밥그릇은 정말로 신성하다. 그리고 이른바 사회적 투쟁을 전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대학교만 해도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은 비교적 조직하기 쉽지만, 무상교육을 위한 투쟁은 어렵다. 그리고 만약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을 하려 하면 노조의 이기주의를 공박하던 사람들이 안면을 싹 바꾸고 정치파업이라며 매도하고,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을 최우선해야 한다고 외쳐댄다. 그들에게는 자기 조합만의 이익에 충실한 현대중공업 노조와 KT노조가 선진 노조의 대표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구조 변화는 개별 노조의 활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점점 더 일깨워주고 있다. 만약 이번에도 같은 산별 노조인 현대, 기아차 나아가 금속노조가 함께 싸웠다면 결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개별 노조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아직도 멀다. 그러나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유럽 국가의 복지시스템과 사회안전망은 노동자 투쟁의 산물이었다. 1~2차 세계대전 전후를 거치며 성장한 노동운동의 압력과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 공산당, 사민당 등의 좌파 정당들의 연합이 정권을 잡으면서 자본가들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도 그런 양보를 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그냥 얻어진 것은 없다. 기득권층의 하사나 은총이 아니다. 모두가 투쟁의 산물이었다.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많은 부분에서 자본의 공세가 있었지만 아직도 이들 국가들은 우리에 비해선 월등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철의 여인 대처가 휘몰아치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한 영국조차도 그렇다.  


강력한 대중의 지지, 파업이나 집회로 현실화될 수 있는 그런 지지 없이는 어떤 정당도 기득권층에게 양보를 이끌어낼 수 없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가 넘는 다수당이었음에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진행한 4대 입법조차 하나도 성사시키지 못했듯. 정권이 바뀌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개혁을 위해서는(비단 혁명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그런 강한 세력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은 그 하나가 될 수 있다(물론 전부는 아니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단결된 노동자의 힘은 강하다. 나는 이 노동자들이 힘이 더 강해지기를, 그들이 더 정치적이 되기를, 그래서 사회적 공공성을 지키는 싸움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는 쌍용차 노동자 같은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세상을 위해서.




 
   

by sonofspace | 2009/08/14 20:54 | 생각 | 트랙백 | 덧글(4)

후손들에게-브레히트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바라면서. 


후손들에게                                  브레히트

I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직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 들지 말고 짧은 한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II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향해 나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내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III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
부탁컨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 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by sonofspace | 2009/08/03 17:14 | 책 속의 한 구절 | 트랙백 | 덧글(3)

강도, 옷차림 부유한 사람에게도 책임 있다.

성을 음식물이나 돈 같은 다른 욕망의 대상과 비유하는 것은 좀 올바르지 않아서 꺼림직하긴 한데 아무튼.

성폭력, 옷차림 야한 여성에도 책임” 50%

그러면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롤렉스 시계를 차고 인적 없는 밤거리를 걷다 강도당한 사람에게도 강도를 유발한 책임이 있는 거냐.

경찰서에서 "그 사람의 돈을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이라고 하면 잘도 먹히겠네. 아니면
"아~ 저 사람도 강도당하고 싶었다니까요! 아니면 왜 저렇게 비싸게 처바르고 밖에 나와요!" 하거나. 

설사 다른 욕망보다 성욕이 특별히 강하고 참기 힘들다 해도, 그것이 상대의 성적 결정권을 침해하고 폭력을 휘둘을 정당한 근거가 되는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왜 피해자에게 전가하는지. 성욕만은 특별하다(혹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지겹다.

물론 나도 남자고, 성욕이 있으며, 그래서 언젠가 순간 헤까닥 미쳐서 성 관련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물론 살인이나 강도를 저지를 수도 있고). 그럴 때는 "저 여자가 날 유혹했어요" 따위의 치사한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전에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아야겠지만...

by sonofspace | 2009/07/22 16:27 | 생각 | 트랙백 | 덧글(2)

더불어 살아가기

감자와 까치밥

 

몇 년 전, 대학교 2학년 때 여름농활에서의 일입니다. 일과가 끝나고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에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밭에서 아직 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님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에 좀 여유가 있어 도와드리기로 하고 같이 밭일을 했습니다. 그 밭은 작은 감자밭이었습니다. 큰 밭이야 요즘은 기계로 캐내지만 작은 밭은 호미로 흙을 뒤집으며 감자알을 골라내야 합니다. 땅속에서 둥근 감자가 나오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고 직접 한 알 한 알 캐내는 재미도 있어서 수확의 기쁨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원래 농활이 단순히 일만 하러 가는 게 아니고 농민분들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농촌의 정서를 배우고 이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려는 게 더 큰 목적인지라 그때도 할머님들과 자식 얘기, 농사 얘기, 시시콜콜한 살아가는 얘기들을 하며 옆에서 같이 일했지요. 그렇게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가 작은 감자알은 그대로 땅속에 두고 큰 감자알만 주워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할머니 저 감자는 왜 안 캐세요?" "으응, 저건 작으니까 안 캐고 벌레들 먹으라고 두는 거여. 갸들도 먹고 살아야지." "아 그렇네요." 그리고 저도 작은 감자는 벌레 몫으로 남기고 큰 것만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벌레들의 몫. 밭에 사는 벌레들에게도 먹을 것을 남겨줘야 한다는 그 마음에 어쩐지 인생의 큰 교훈 하나를 배운 것 같았지요.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미물에게도 살아갈 몫을 남겨주는 그 넉넉함과 여유가 어딘지 아릿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많은 곳에서 그런 넉넉한 마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을에 감을 따고서 까치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까치밥도 그런 경우겠지요. 어디 까치뿐일까요. 밤이나 잣 같은 다른 작물들을 수확할 때도 조금씩은 남겨두어 산짐승, 들짐승들을 배려하는 풍습이 고래로부터 있었습니다. 농부가 콩을 심을 때는 한 곳에 세 알을 심는다고 합니다. 하나는 벌레의 것, 하나는 새의 것, 하나는 인간의 것. 듣기로는 야외에 나가 음식을 먹을 때 조금씩 밖으로 음식을 뿌리는 '고수레' 풍습도 주변의 온 자연과 더불어 먹고 나누고자 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나 하나'만 먹어서는 안 되고, 나 혼자서 차지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산물은 다같이 나누는 것이며, 세상은 더불어 다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선한 마음들을 까치밥 같은 작은 배려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풍습들은 단순히 사람이 착해서, 너그러운 마음의 발로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물에 조금씩 몫을 남겨주는 풍습에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감자의 경우, 작은 감자를 남겨둔다면 흙속에 사는 벌레와 미생물들이 감자를 양식삼아 번성할 것이고 그들의 번성은 밭의 흙을 비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의 농사 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오겠죠. 까치밥도 그렇습니다. 까치밥을 남겨둠으로써 까치들이 밭에 내려가 다른 작물들을 먹어치우는 걸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 몇 년 사이에 야생동물들이 민가로 내려와 피해를 주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그들의 몫을 남겨두는 일이 영 터무니없고 비경제적인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길이 진정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런 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삶'이겠지요.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그러나 이런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 현실의 경제환경에서는 도통 통하지가 않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오래간다는 소박한 진리는 복잡하고 이상야릇한 논리들에 가리기 일쑤이고, 세상은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탐욕꾼들로 가득 찬 듯합니다.

 

얼마 전, 최저임금이 4,110원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이전의 4000원에서 2.75퍼센트 올랐지요. 정말 쥐꼬리만큼 오른 거지만 사실 이것도 다행일지 모릅니다. 경영계 인사들은 경기가 어렵다며 오히려 최저임금 삭감을 주장했으니까요. 노동계 측은 13퍼센트 인상을 주장했지만 간신히 삭감을 면하고 2.75퍼센트 인상하는 데 그쳤습니다. 물론 물가 인상을 감안한다면 삭감이나 다름없겠죠. 현재 최저임금이 4000원인데 이걸 한달로 환산하면 83만 6000원입니다. 그 유명한 88만 원보다도 적지요. 게다가 노동자 평균 임금의 36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이걸 또 줄이자고 주장하다니... 이 사람들은 까치밥을 남겨주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것마저 약탈하려나 봅니다. 저소득자들의 이런 최후의 보루마저 허물려는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영세한 기업은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서 경영이 힘들어지고 그러면 고용이 줄어든다며 딴에는 굉장히 노동자들을 위해서 최저임금을 줄이려는 것인양 말합니다. 척 듣기에도 얄딱구리한 논리이고, 이를 증명해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식견해는 이렇다고 합니다. “최저임금 제도는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있더라도 미미하며 일반적으로 저임금계층 일소, 임금격차 해소, 소득분배구조 개선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또한 미국 등에서는 경제위기를 맞아 내수소비를 증진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영자들은 어떻게든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싶은 모양입니다. 뭐 우리나라야 수출로 먹고사니까 내수 따위는 상관없으려나요.

 

더불어 살 줄 모르는 야박한 태도는 비정규직 법안에서도 보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면 노동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니라 노동자가 마음 편히 일하며 일자리를 걱정하지 않을 권리 또한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상충된다면 타협점이나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게 정치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러나 현재 눈에 빤히 보이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계속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역시 비정규직이 해고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며 눈물겨운 노동자 사랑을 보여줍니다. 정말 비정규직의 처우를 생각한다면 비정규직 사용사유를 제한하고 편법 해고를 막는 것이 급선무겠지만 이 사람들은 그러기보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좀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줘야 비정규직에 도움이 된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칩니다. 여기서도 넉넉함과 배려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

 

어느 생태계이건 어느 특정 종만 번성하는 생태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약육강식이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자연에 약과 강은 없습니다. 호랑이든 토끼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어느 한 종이 위기에 처하면 생태계 전체가 위기에 처합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도 생태계의 일부이기에 인류의 안녕도 다른 자연물과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자연물과 더불어 살려 했던 우리의 조상들, 더 나아가 세계의 전통사회들은 이런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인간 세상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계급만이 특권과 부를 독차지한 사회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봐왔습니다. 현실을 봐도, 한국의 높은 대외의존도와 빈곤한 내수가 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된 지 오래이고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도 이를 지적합니다. 우리는 비슷한 경제 체제인 일본보다도 대외의존도가 세 배나 높고, 특히나 IMF를 맞아 시작된 신자유주의 재편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진작에 대기업, 재벌 중심의 압축 성장을 탈피하고 중산층을 탄탄히 육성했어야 했음에도 한국은 갈수록 이들에게 '몰아주기'를 해왔습니다. 툭하면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니 FTA 등 개방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수출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제 내수를 신경 쓸 때다'라고 말했어야 옳았을 겁니다. 내수를 신경 쓴다는 것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소득을 늘려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까치밥을 남겨주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 피폐해지는 중산층. 약해진 경제 체질 때문에 국제적 변동 때마다 휘청거리는 경제...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과는 너무도 멀어 보이는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단기간에 이득을 최대한 빨아먹고 빠지는 투기 자본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이 우리의 인간성과 부합할 뿐 아니라 오래도록 안정적인 경제 체제를 유지해가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면(감세 정책 등으로) 전체 경제가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헛소리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역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논리와 여론 호도, 교묘한 술책은 이런 헛소리를 수긍하게 만듭니다. 사회의 부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 부의 증진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특히 사회적 최약자들이 생활 수준이 그 나라 전체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약자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모두가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겁니다. 사회적 약자 보호, 경제적 불평등 해소는 우리 양심에 있는 정의의 명령일 뿐 아니라 건강하고 안정적인 사회를 위한 필수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일자리에서 오래 버티기도, 집을 구하기도, 살아가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지금 사회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건 '벌레들의 몫'을 남겨주는 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겠다는 마음. 감자와 까치밥을 남기는 것이 낭비이고 비효율이라는 얕은 생각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이런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중세의 시인 존 던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부분이다...(중략)...어떤 이의 죽음에도 나는 줄어든다/인류의 일부인 나는" 타인의 삶이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 그러니 함께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일, 그런 세상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by sonofspace | 2009/07/14 22:51 | 생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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