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예술과 자본주의적 현실.

얼마전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놓고 촉발된 소설가 김영하와 평론가 조영일의 논쟁을 잠시 봤다.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김영하왈, 예술이란 낭만적 충동이 이끌어나가는 것이며 나르시스적인 자기 만족이 예술의 자양분이라는 것이며, 조영일왈 그런 태도는 유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며 배 곯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인들끼리의 공개적인 논쟁이라는 점은 자못 고무적이지만 썩 영양가 있는 논쟁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예술을 바라보는 둘의 시선이 층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줄곧 의도적인지 아닌지 '상품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며, 창작자로서의 태도만 이야기할 뿐이며, 조영일은 예술에도 상품 유통의 논리를 적용한다. 말하는 대상이 다르니 논쟁은 별로 소득이 없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창작의 측면에서는 김영하의 예술가의 자기 만족 운운도 이해가 가지만, 모든 예술 작품이 상품화된 현실에서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영하의 발언은 자칭 '예술가'의 창작 활동과 생계 유지가 분리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그가 예로 든 프루스트 역시 일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글만 써도 먹고살 정도의 재산은 있었다. 김영하의 예술관은 어떻게 생각하면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를 부정하는 것이며, 예술가는 예술로 생계를 유지할 생각 없이 그저 나르시스적인 자기 도취에 빠져 창작을 하는 것이며 어쩌다 운이 좋으면(자기처럼) 예술로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을 '시장'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신의 자유이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각이다. 예술은 한참 전부터 자본주의적 시장 안에서 거래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이 시장에서의 상거래 관계로 환원된다고 선언했듯이 말이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牧歌的) 관계를 파괴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타고난 상전들에게 얽매어 놓고 있던 온갖 봉건적 속박을 가차없이 토막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이해 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중략)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영예로운 것으로 생각되어 왔고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보아 오던 모든 직업에서 그것들이 갖고 있던 후광을 빼앗았다. 그들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만들어 버렸다."
 
불쾌할지는 몰라도 예술이라는 상품의 생산자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생산자들과 그닥 처지가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머리 위에 낭만적인 '후광'이 드리워져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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