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읽다.

드디어, <자본론>을 읽었다. 마르크스의 그 성가 높은 책.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성실히' 이행한 학생들이라면 이름만 듣고도 겁을 먹을 만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대학에 들어와서 나름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자본론>이 버젓이 학교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난, 빨갱이들이나 읽는 금서인 줄 알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이름만 들어왔던 <자본론>의 실물을 처음 보게 된 것이 무려 8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세상은 조금 더 살기 힘들어졌고(현재의 나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본의 지배는 더 공고해졌고), 나는 한국의 표준적인 학생에서 불온한 좌파 쪽으로 성큼성큼 이동했다. 회색은 점점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 풋풋한 스무 살에서 시들어가는 스물 여덟이 되었다.

 

 ‘자본의 지배’,라고 나는 썼다. 내가 이해하는 바, 사회주의는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사상이다. 자본은 단지 인류가 창조해낸 재화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만들어낸 자본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위하여 기능할 때1) 자본은 하나의 물신(物神)이 되고 인간은 그 자본에 지배당한다. 조금 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나는 무자비한 자본의 운동으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해 알게 됐고,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의아해했다. 불어나는 빚더미를 감당 못해 농약을 마시는 농민들을 보며,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당하고 망연자실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철거민들의 투쟁을 보며 의문은 커져갔다. 세상의 많은 비극들이 ‘자본’ 때문에,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놈의 돈’ 때문에 벌어지고 있었다. 자본의 문제, 자본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숱한 문제를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점점 그 사실을 실감하면서 나는 마르크스를 떠올렸다. 마르크스는 백 년도 더 전에 당시 자본주의의 중심지였던 영국에 거주하면서 자본의 문제를 가장 철저하고 날카롭게 지적해냈다. 오늘날 아직도 자본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자본론>은 결코 낡은 책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책에서 제시한 많은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일어나고 있다.

 


자본론,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간단하다. 그는 모든 가치의 기원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황금이 왜 가치가 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은 황금을 만드는 데 들어간(광석을 캐고, 운반하고, 제련하는 데 들어간) 노동 때문이다. 쌀, 자동차, TV, 옷, 신발 등의 가치 역시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노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화폐, 그리고 자본 역시도 근본적으로 노동의 생산물이다. 즉, 모든 것은 노동이다.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재화들은 고대로부터 노동자들의 노동한 결과로 축적된 생산물들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철저하게 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애던 스미스와 리카르도로 이어진 고전파 경제학의 한 전통 아래 있는 것이지만, 마르크스의 진정한 천재성은 ‘노동’과 ‘노동력’의 분화에 있다. 앞서 말했듯 노동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활동이다. 5시간 일해서 만든 상품은 5노동시간만큼의 가치가 있다. 이 상품은 마찬가지로 5노동시간이 들어간 상품과 교환할 수 있을 뿐, 6노동시간이 들어간 상품이나, 4노동시간이 들어간 상품과는 교환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교환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는 손해 혹은 이득을 보기 때문에 올바른 시장 안에서 그런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마르크스 이전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설명해내지 못한 모순이 있다. 모든 것이 등가로 교환된다면 이윤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노동가치설에 입각하면, 유통, 즉 상품의 교환 과정에서는 아무런 이윤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어디에서 이윤을 얻는가?



마르크스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의 특징이 이윤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경제학에서 ‘노동력’이란 말하자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상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은 자본가(부르주아)에게 자신을 노동시킬 수 있는 권리, 즉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구매해서 노동을 시켜 상품을 만들어낸다. 자, 여기에서 비밀이 풀린다. 노동력은 상품이므로 시장에서 거래되고, 정해진 가치 혹은 시장 가격(수요와 공급 및 여타 사정에 의하여 변동되는)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노동력’을 사용해서 이루어지는 ‘노동’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노동자에게 얼마나 많은 노동을 시키느냐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를 초과하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잉여노동을 통해 자본가는 이윤을 얻는다.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 활동인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형태의 상품이 되면서 자본은 이윤을 얻는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관점대로라면, 이윤은 기본적으로 노동력의 구매와 그 사용으로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에서 나온다. 생산과 그에 따르는 소비는 자본의 절대적인 과제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발전하는 나라는 생산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세계의 공장’들이었다. 19세기의 영국, 20세기의 미국, 그리고 21세기에는 아마도 중국. 분명히 생산 없이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2)



만약 집을 20년, 30년이 아니라 백 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짓는다면 모든 건설회사는 망할 것이다. 건설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그리고 부동산 투기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주기적으로 재개발을 실시해야만 한다. 옷을 사람들이 10년 넘게 입기 시작한다면, 대다수의 의류회사들은 줄줄이 망하기 시작한다. 의류회사의 생존을 위해서는 계절별로 옷을 구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각종 유행과 마케팅 등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상품의 내구연한이 다할 때까지 내버려둬서는 절대 안 된다.3) 새로운 상품은 생산되어야 하고, 소비자들을 자극해 어떻게든 구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눈부시게 발전한 마케팅 전략들이 그 선봉에 서 있다. 핸드폰, 컴퓨터, 신발, 자동차, 우리가 사놓고 사용하지도 않는 많은 상품들. 제품이 교환주기가 빨라질수록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도가 줄어들게 되면 자본은 위기를 맞고, 심하면 이른바 ‘공황’이 발생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대량소비, 아니 과잉소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주기를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노력 중 최악의 것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창조를 위한 파괴가 이루어진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며, 삶의 터전이 파괴된다. 전쟁으로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면 다시 건물을 지어야 한다. 그렇게 재건에 참여한 자본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전쟁으로 유전이 파괴됐다. 다시 건설한다. 그러면 역시 그 일에 참여한 자본은 이윤을 얻는다. 물론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다. 이윤은 개별 자본이 얻는다. 전쟁에서는 물론 많은 자본이 문자 그대로 파괴된다. 그러나 ‘자신의 자본’이 파괴당하지 않는 한 자본가들은 남의 자본을 얼마든지 파괴한다. 노동자들이 피와 땀이 스며든 생산물은 그렇게 자본을 위한 포화 속에 사라져간다. 다시 만들기 위해 파괴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나도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정말로 벌어진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면서 내세운 가장 큰 논리는 전후 재건 사업에 참여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불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행운이다.



전쟁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배제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대량생산과 그로 인한 대량파괴는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잉여 가치의 취득을 위해서 자본은 끊임없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더 이상 소비가 감당해내지 못하는 과잉생산에 이르게 된다. 그럴 때 대규모 불황이 발생하고 공들여 만든 상품들은 파괴하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 된다. 상품이 수없이 생산되고 수없이 폐기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아찔할 지경이다. 엄청난 양의 상품이 생산되고, 우리에게 소비를 종용한다. 사람들에게 돈이 없어도 소비하라며 신용카드를 안겨주고, 각종 대출 상품 역시 운영한다. 소비가 필요를 충족하는 것을 넘어선 지는 오래이며, 이제는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자신이 어렸을 때보다 얼마나 더 다양한 물건들이 생겨났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물건들을 얼마나 더 빠르게 교체하는지도. 더 더 더, 새롭고, 멋지고, 세련된 제품들을 더 더 빠르게……. 이런 아찔한 움직임을 보면 자연히 가슴속에 의문이 든다. 대체 언제까지 더 빨라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당당히 말한다. “언제까지라도!” 인간의 놀라운 창의성과 재능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기술은 더 발전하고 속도에 부하가 걸릴 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좋은 일이며, 우리는 자본주의가 안겨준 이 풍요를 마음껏 향유하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 역시 인간의 잠재력을 믿지만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적어도 지구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사회를 위한, 인간을 위한 자본

이 놀라운 자본주의 상품경제 시스템은 전적으로 지구의 풍요로움에 기대고 있다. 우리는 거의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자원을 이용하여(그리고 역시 노동력을 수탈하여) 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지탱하고 있다. 그로 인한 자연파괴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심각한 수준이다. 개별 자본들의 무한 경쟁이 계속되는 한, 미친 듯이 가속되고 있는 상품 경제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내가 현재의 자본주의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는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의 지배를 반대한다는 뜻이며, 자본의 이익이 최우선이 되는 사회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본이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위한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그런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회주의’라고도 부를 것이다.



물론 이런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건강을 위해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려고 해서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듣는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이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사회의 기본적인 요건으로 자리 잡은 노동법, 연금 제도, 실업 급여, 고율의 누진세 등은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심각히 ‘사회주의적’인 제도들이다. 19세기의 자본가들이 보기에는 현대 유럽, 아니 미국조차도 사회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일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와 형식의 사회가 인민 전체의 삶에 혜택을 줄 수 있느냐이다. 그런 의미에서 등소평은 정말로 옳은 말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제도)이든 자본주의(적 제도)이든 유익한 것이 좋은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제도이든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가장 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시대에서 활동하며, 자본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와 경쟁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하고, 어째서 이러한 체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물론 그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이후 자본주의 체제는 내부적으로 사회주의적 제도를 도입하는 방향(노동자 간, 자본 간의 경쟁을 제한하고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으로 변했으며, 그 움직임은 상당 부분 마르크스주의에 근거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의 무차별적인 경쟁을 막음으로써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예를 들면 공정거래법).



더 중요한 점은, 이윤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꺼리지 않는 자본의 속성과 행태는 현재에도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더 많은 잉여노동의 착취를 통한 더 많은 이윤이라는 자본의 공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자본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그러나 낡은) 흐름이 세상을 뒤덮은 이래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강화되었다. 오늘날 21세기에 자본의 자유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19세기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비판한 자본가들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으며, 자본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곳을 볼 것도 없다. 자본에 고용되어 일하는 우리 모두가, 그리고 더 크고 강한 자본가에 퇴출당하는 더 작은 자본가들이 그 희생자들이다. 게다가 자본 간의 무한한 경쟁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자본이 존재하는 한, 자본으로 인한 문제 역시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이윤 추구라는 자본의 냉혹한 법칙은 그 주인인 인간의 삶을 집어삼키기고 사회를 파괴한다. 어떤 식으로 사회를 변혁시켜야, 자본이 전체 사회를 위해, 인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운동 과정과 본성에 대해서는 놀라운 혜안을 보여주었지만, 구체적인 대안 사회의 모습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가 꿈꾼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은 단지 유토피아적인 비전일 뿐이었다. 또한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의 사회주의계획경제 실험은 비참하고 혹독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과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을지라도, 자본의 문제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자본이 인간의 삶을 침탈하는 세상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놀라운 책은 그러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지할 동료가 되어준다.

 

 


 

1) 물론,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보자면 재화가 이윤을 위하여 생산 활동에 투여될 때만이 자본으로 불리지만.

 

 

2)  아직도 미국의 영향력은 엄청나지만 미국의 재정적자는 거의 회복 불능 수준으로 보인다. 미국 소비자들의 돈은 중국으로 몰려들고, 중국(및 다른 국가)은 그 돈으로 미국 국채를 사서 미국이 다시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이 이런 구조를 가능하게 해준다. 생산 영역에서 밀리고 있는 미국은 금융이나 지식산업에 대한 비중을 지난 십수 년간 크게 늘렸다. 미국의 경제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실물 경제 부분이 아니라, 금융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우위를 활용해, 각종 금융 상품을 개발해 전 세계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특허권 등의 지적재산권 강화를 통해 독점 지위에 근거한 이익을 얻고 있다.

 

 

3) 2002년 크룩스라는 신발이 발매되었다.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재질로 만든 이 신발은 전 세계적으로 1억 켤레 이상이 팔렸다. 그러나 작년에 이 신발을 만든 회사가 파산을 했는데, 너무 내구성이 뛰어나 사람들이 신발을 더 사지 않아서였다.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물건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망하는 제품이다. 


덧글

  • 몽상가 2010/03/09 22:33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미루고만 있었는데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 sonofspace 2010/03/11 12:54 #

    네 역시 고전은 읽을 가치가 있더라고요.
  • 3 2010/03/10 00:58 # 삭제 답글

    자본론 수학적인 내용 있어서 문과생은 이해하기 빡세다던데

    어떻게 잘 이해는 하셨나요?
  • sonofspace 2010/03/11 12:54 #

    전 1권만 봐서 그런지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