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08일
노무현 시대의 마감과 과제.
바람이 분다. 2002년 대선 때처럼, 2004년 탄핵 때처럼 다시 노무현이라는 바람이 분다. 정국은 크게 바뀌었고, 모든 정당이 추세를 주시하고 있다. 노무현은 갔지만 그가 남긴 파장에 사람들은 고민하고 갈등한다. 언제나처럼 질문은 이렇다.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
1. 노무현이라는 시대정신
2002년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이회창 지지자를 제외한(그리고 소수의 이인제 등의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권영길을 지지한 민노당원들도 그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선일보 등에서 '진보'내지 '좌파'라 지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했다. 노무현의 승리는 변화에 대한 열망의 승리였다. 엘리트주의, 지역주의, 수구세력, 경제적 불평등, 부패, 굴욕적인 친미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의 승리였다. 나는 노무현을 당선시킨 시대정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화, 개혁, '사람다운' 세상.
난 지금도 이 시대정신은 옳다고 생각한다. 당시 노무현을 찍은 사람들은 사회고위층들의 병역 비리가 없는 세상을, 미군의 범죄를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는 사회, 더 나아가 자주적인 국가를, 기득권자들의 특권과 전횡이 없는 세상을, 친일파를 처벌하기를, 북한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나라를 바랐다. 자유를, 평등을, 평화를, 자주를 바랐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길 바랐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투철한 인권변호사였고, 독재자에게 일갈을 서슴지 않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공박하고, 피해볼 줄 알면서도 소신을 지킬 줄 았았던 멋진 정치인은 그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바람은 그때도 옳고 지금도 옳다. 노무현이라는 바람은 이런 바람에 근거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많은 좌파들도 그의 승리를 기뻐했던 것이다. 그의 승리는 한국 사회가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독재 재벌 냉전 수구 세력과 결별하고 좀더 균형잡힌, 적어도 당시보다는 '왼쪽'으로, 사회, 좀더 민주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향하게 되었다는 상징으로 보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이런 바람이 좌절되었다는 상징으로 여겨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 그러나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이 '사람다움'이나 '상식'이란 무엇인가? 이 말들은 굉장히 듣기 좋고 아름답지만 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막말로 이명박 대통령도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한다(믿어주진 않겠지만). '진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의 사회주의적 좌파들만 아니라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민주당까지도 스스로들을(그리고 공통의 반대 세력인 조중동 또한 그들을) '진보'라고 지칭한다. 물론 그들이 한나라당보다야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엄격히 따졌을 때는 엄연히 다른 이들 진영들이 뭉뚱그려져서 대충 '진보'라고 칭해지고 인식된다. 그리고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분명히 일정 부분 진보의 한 일파로 인식되고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민주노동당의 일부 지지자들은 그런 인식으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었다.
이런 동상이몽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이미지가 아니라 정책이니까. 참여정부의 정책 중에는 좌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좌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적 재분배에 대한 부분이 없었고, 오히려 이를 그저 시장의 자유에 맡기는 성향이 강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고백은 명백한 현실을 인정한 발언이었지만 그는 권력을 시장으로부터 찾아와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좌파들은 바로 그러기를 바랐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비정규직 법안과 한미 FTA로 노무현 정권은 진보 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명박의 반동에도 이런 차이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다르다. 노무현이 생각했던 '사람다운 세상'과 좌파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어느 정도 겹치고 교차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그 길은 가는 곳이 다르다. 그 점을 명백히 하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둔다면 언젠가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선을 그을 건 분명히 그어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민주 사회에 사는 만큼 이 다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을 추구하고, 지지자를 끌어들이고, 활동을 하면 된다. 당연히 이 복잡한 세상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의 적합성, 얼마나 더 세상에 더 도움이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지가 이런 주장들의 우열을 가릴 것이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추구하며 때론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한두 사안에서 의견이 같다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단순함과 안이함에서 나온다. 여전히 반독재 대동단결을 외치는 사람들도 물론이거니와 과거 좌파들도 그런 실수를 했었다.
3. 어부지리는 그만두자
참여정부 후반기 중산층 경제가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보수 정당과 언론이 당시 참여정부를 공격하며 진보좌파를 '무능력' '실용성 없는 이념 논쟁' '경제 파탄'이라는 색깔로 덧씌우고 있을 때, 속칭 '진짜' 진보들에게서 '우리는 쟤네들(참여 정부)과는 다르며 쟤네들은 중도 우파에 불과하다'는 볼멘 소리가 나왔었다. 그러면서 '진짜' 진보가 도매급으로 하향 평가를 받고 있다며 참여 정부의 실정을 누구보다 강력히 비판했다. 물론 이 말은 옳다. 친노 내지 열린우리당, 민주당의 지향은 민주노동당과의 지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이런 반응은 훨씬 더 일찍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2002년 대선 때부터 노무현도 똑같은 우파 후보일 뿐이라고, 이회창이 되는 노무현이 되든 방식이 다를 뿐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운동 단체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성공이 이어졌을 때는 '진짜' 진보들조차도 뭉뚱그려서 '진보'라고 취급받는데 만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보단 좀더 일찍 선을 분명히 긋고 차별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현실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 않았을까?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최대의 득표를 얻은 것은 2004년 총선 때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최대 당이 되었을 때였다. 솔직히 생각해봤을 때 이 13퍼센트에 달했던 지지도가 민노당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당시 민노당은 탄핵 역풍을 어부지리로, 숫째 공짜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동반해서 상승한 지지율은 몇 년 후 마찬가지로 동반해서 추락한다. 민노당을 열린우리당과 차별화하고 자신만의 지지층들을 구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진보 쪽의 사람들은 때로 열린우리당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사실은 유권자들이 민노당을 열린우리당의 2중대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실제의 노력과 생각이야 어떻든 결과적인 현실은 그랬다.
당시에 진보 세력은 안이하게, 자신들의 높은 득표율을 보며 시대의 흐름이 진보 쪽으로, 좌파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또한 작년의 촛불을 보면서 그리고 노무현 추모 정국을 보면서도 자신들에게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지만 까놓고 말해, 이런 대규모의 사회 변혁에서 '진짜' 진보들이 맡은 역할은 거의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촛불 이후에도 진보정당의 역량이 강해졌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어부지리로 뭘 얻을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얻은 지지가 쉽게 사라진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어떤 누군가가 일으킨 바람이 아니라 보다 가능성 있고 성공적인 비전, 진짜 진보만이 제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비전을 제시하고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못 얻으면 역량이 부족한 거고. 누구 때문에 안 되고, 무엇 때문에 안 되고.... 그런 건 이제 그만두자. 난 조금 더 겸허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이명박이라는 시대정신
기억해야 할 것은 노무현을 선택한 시대정신이 5년 후에는 이명박을 선택한 시대정신으로 바뀌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탄핵 이후 10퍼센트대 지지율로 전락한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에서는 과반수를 넘는 의석수를 획득했다. 게다가 이명박은 2002년의 이회창보다도 더 부패하고, 무식하고, 폭력적인 인물임에도 그렇게 되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경제 성장에 대한 맹신으로 바뀌었다. 정의라는 이름은 집값 상승이라는 판타지에 가렸다.
보수 언론의 공세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잃어버린 10년'은 완전 헛소리이고,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서민들은 실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느꼈다. '노무현이 경제를 망쳤다'는 소리가 설득력을 가졌던 건 정말로 당시에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노동 소득보다도 집값, 주식, 펀드 등으로 더 큰 수입을 챙기는 모습들을 보고서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중동의 헛소리가 먹히는 데는 대체로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 그리하여 자유, 평등, 평화, 자주를 요구하던 사람들은 불과 5년 만에 성장, 성공, 취업, 부자되기라는 가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국개론'이라는 치사한 개념을 도입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가 아닌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노무현 정권 말기~17대 대통령 선거 이후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논리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시대정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명박뿐만 아니라 모든 후보들이 경제 살리기(=성장)이라는 프레임에 갖혀 있었고 다수의 유권자들은 그 일을 이명박이 가장 잘 하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 역시도 한미 FTA로 대변되는 성장 위주 정책과 '최고의 복지는 곧 일자리'라는 식의 복지 개념을 추구하면서 이런 시대정신의 창조에 일조했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 모두의 한 내면이다. 우리는 모두들 좀더 나은 사회를, 정의롭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원하는 한편으로 나만은 잘 되길, 내 집값만은 오르고 내 주식만은 오르고 내 자식만은 잘 되길 바라고 있으니까.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 많은 부동층들은 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때그때의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현재의 뜨거운 추모 열기도(지금은 약간 가라앉았지만) 사실 언제 또 변할지 모른다. 지금은 조중동과 한나라당이라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언젠가 다시 한나라당을 찍게 될지 모른다. 한나라당의 약 35퍼센트가량의 고정 지지율은 우습게 볼 게 아니라서, 그 숱한 비리와 위기에도 한나라당이 존속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현재의 정치 세력들이 (대중들이 보기에)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을 흔들고 부동층을 정치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정치 지형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바람은 풀을 눕힐 수 있지만 풀을 뽑거나 땅을 바꾸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개간만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니라 정말로 정치적인 행동만이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다.
5. 정치, 정치, 정치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유산을 두고 서로 잇속 계산을 하고 있다. 서로 노무현의 '적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고생들 하고 있다. 가장 같잖은 건 민주당이다. 불과 1년 반 전에 참여정부의 과실을 회피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버리고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간 주제에 영원한 '우리의' 대통령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정동영은 적자가 될 수 있나? 아니, 절대.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고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미미한 부산에 출마했고, 그 일은 오랫동안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정동영은 탈당을 하고 깽판을 치면서 고향인 전주로 돌아가 '전주의 아들' 어쩌고 하고 나자빠지니 글러먹었다. 아무래도 유시민을 비롯한 친노 세력이 그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하길 빈다. 한나라당 같은 짝퉁 시장주의가 아니라(실상은 친 재벌주의) 제대로 된 자유시장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을 하나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난 그 이념에 반대하고 좌파도 진보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런 세력이 존재하는 한 정치적 다양성이 표출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유산이 아니라 부채인 셈인데 물론 이 사람들은 갚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갚을 생각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대가리가 말을 안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악성 채무자다. 배째라고 들이눕는데 째지도 못하고...언젠가는 정말 째야 할 것이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군소정당은 사실 유산도 부채도 없다. 말한 대로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이랑 같이 취급당해서 무능하다는 꼬리표가 달렸다고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노무현이 아니라 보수 언론의 프레임이 그렇게 만든 거였고(노무현도 괜히 민노당이랑 동급의 좌파 취급을 받아서 억울했을 듯하다), 차별화를 못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물려받을 것도 없고, 갚을 것도 없다. 그의 생전에도 그랬듯이 그가 추구한 정책 중 옳다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그르다 여기는 것은 여전히 비판하고 거부하면 된다. 물론 이명박의 정책 중에서도 옳은 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개인적이라면 모를까 노무현과의 정치적인 은원 관계 같은 건 이미 예전에 끝났다. 자신들의 길을 꿋꿋이, 역량을 조금씩 착실하게 키워가며 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친노든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들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누가 당선되든 나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정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는 현재는 진보의 위기보다도 민주주의의 위기보다도 정치의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토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마주한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정치에 있지 않고 시장에 있는데 대체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정치와 선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무력해진 정치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을 부르고 이명박이라는 정치색이 없는 (자칭) 실용주의자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기여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엄연한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정치의 무기력과 공백은 지속되리라 생각한다. 비난과 증오, 진흙탕 싸움으로 점철된 정치의 위기를 넘어 정말로 이념에 충실한, 그러면서도 정말로 실용적인 정치를 구축하는 것이 노무현 시대 이후의 과제일 것이다.
# by | 2009/06/08 21:08 | 생각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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