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5일
[인생의 만화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슬램덩크> 종료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90년도 후반에 한국에서는 농구 붐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박지성이 EPL을 비롯한 해외 축구 리그가 많은 스포츠 팬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그때 청소년들이 열광했던 건 NBA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때는 마이클 조단이라는 희대의 카리스마가 3회 우승 후 은퇴, 그리고 복귀해서 또 3회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하며 NBA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그 인기를 몰아 NBA 선수 카드도 한때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미국 리그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프로리그 출범 전 농구대잔치는 형식상 아마리그였음에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이상민, 서장훈, 문경은, 우지원 등이 포진한 연세대와 전희철, 현주엽, 김병철, 양희승이 있던 고려대는 '오빠 부대'를 끌어들이며 한국 농구의 중흥을 불러옵니다. 이후 10년여간 국가대표를 맡겨 될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었으니 굉장한 팀이었죠(연대는 대학생 팀인 주제에 실업팀도 죄다 이기고 농구대잔치까지 우승했으니 말 다했죠). 야구와 축구로 일색이던 운동장에 농구하는 애들이 늘어난 것도 이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농구 열풍의 한축에는 분명 이 만화 <슬램덩크>도 있었습니다. 당시 신인이었던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데뷔작인 이 만화는 농구 불모지인 일본 내에서 1억 이상 팔리며 스포츠 만화의 확고부동한 대표작이 됩니다. 물론 한국에서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요. 이후 발표되는 모든 스포츠 만화는 필연적으로 <슬램덩크>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만한 감동과 재미를 주는 작품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슬램덩크>는 정말로 수많은 소년들을 농구대 아래로 모여들게 만들었습니다.

<슬램덩크>의 매력은 단연 농구, 아니 스포츠의 참된 감동을 절절하게 전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도전, 노력, 열정, 승리, 팀웍, 투혼 그리고 때론 승리보다 더 안타까운 패배와 패배의 눈물도. 우리가 스포츠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이 <슬램덩크>에 담겨 있습니다. 채치수가 평생을 꿈꿔온 전국대회에 진출했을 때 흘린 눈물은, 방황과 일탈의 나날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정대만의 농구에 대한 열정은 스포츠와는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어떤 뜨거운 혼을 불어넣습니다.
그중 <슬램덩크>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슬램덩크>에 천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강백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농구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전국대회에서 활약한다는 건 좀 상식에 맞지 않긴 합니다만, 우리는 강백호의 실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급상승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건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경기' 못지 않게 '연습'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만화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슬램덩크>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작품들은 이 점에서 우를 범한 경향이 많습니다. 풋내기 주인공의 재능과 활약에만 집중할 뿐 노력의 과정을 생략해서 리얼리티를 상실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이 경기 중에서도 밥 먹듯이 파워업하게 되죠.
그러나 이는 <슬램덩크>의 참된 매력을 간과한 일입니다. 우리가 <슬램덩크>에서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재능과 활약이 아니말, 노력과 열정입니다. 정말로 <슬램덩크>에서 감동적인 것은 발목을 삔 채로 경기에 나서는 채치수의 투혼이고, 골밖에 보이지 않아 슛을 던질 뿐인 정대만의 의지입니다.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구절이 깊은 감동을 남기는 것도 강백호의 점프슛 2만 번 연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강백호나 라이벌 서태웅이 아니라 불꽃남자,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이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리얼한 그림체가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리얼한 '땀'들이야말로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집약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만화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재능 없는 평범한 선수이지만 노력만큼은 열심히 해온 권준호가 결정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는 부분입니다. 슛이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안경선배의 중고등학교 6년간의 회상은 독자들에게 '이 골이 꼭 들어가야 해!'라는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그 장면에서 체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농구를 시작했지만, 중학교 졸업 시합 때는 누구보다 슬프게 울었고, 농구를 그만두지 않고 채치수와 함께 농구부를 이끈 안경선배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기를 바라게 되지요. 그리고 이 소망대로 골은 성공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의 드라마, 그것이 <슬램덩크>의 진면목입니다.

<슬램덩크>는 영광의 순간에 끝이 났습니다. '왕자' 산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나서 그 후의 허망한 패배는 나레이션으로 설명되며, 머리가 약간 자란 강백호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끝을 맺습니다. 당연히 북산의 전국재패를 희망하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나름 충격이었죠.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2부가 나오리라 믿고 기다렸지만(그래, 강백호도 부상 당했으니 이렇게 끝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아직 1학년인데 다음에는 전국재패해야지!) 아직도 소식은 요원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아마도,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으로 농구를 시작한 풋내기 강백호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한 사람의 '바스켓맨'이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규칙조차 몰라서 공을 들고 띄고 발차기를 하던 강백호가 드리블, 패스, 레이업, 골밑슛, 점프슛 등을 배워가고 북산에 없어서는 안 될 남자가 되죠. 산왕전은 강백호의 영광의 순간이고 절정입니다.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에서 한 사람의 성장 스토리는 사실상 완결됩니다. 전국재패를 했으냐 안 했느냐에 상관없이 <슬램덩크>는 이미 충분히 할 이야기를 다 해놓았습니다(떡밥을 좀 뿌려놓은 게 있긴 하지만).
물론 앞으로의 이야기, '바스켓맨' 강백호가 또 어떤 농구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겠죠. 그러나 그 만화는 분명 이전의 <슬램덩크>와는 분위기가 다를 것이고 그 틀로 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어려운 문제일 겁니다. 그래서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줄창 <베가본드>만 그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슬램덩크>를 읽으면 정말로 안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 집니다. 이젠 학원 스포츠하고는 몇 광년이나 떨어진 늙은(?) 몸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는 게 스포츠 만화의 힘이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들이 그런 마음을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건 정말로 아쉬운 일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굳이 그걸로 성공하지 않더라고, 그저 열정을 발산하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한 학원 스포츠가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좀더 반짝거렸을 텐데요. 이미 어른이 된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제 아이들 세대들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슬램덩크>를 읽고 학교 농구부에 입부 원서를 내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by | 2009/04/15 20:02 | 즐거운 인생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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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은근 눈물도 많이 흘린 만화~ 특히 '정대만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신은 정말..
오늘 슬램덩크나 다시 보고 자야겠습니다. ㅎ
최신판 보러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