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문제의 원인(게다가, 가장 본질적인 원인?!)을 규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과 관계의 환원론에 빠리지 쉽다. 단일 원인을 주장하고 ‘주적을 규탄·타도’하기보다는 문제가 전개되는 맥락에 대해 사유할 때, 문제가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할 때, 다른 상상력을 가질 때, 저항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떠한 권력도 투명하게, 전일적으로 관찰되지 않으며, 어떠한 전제 권력 아래에서도 인간의 경험은 그 권력의 주조 방식을 넘어선다. …(중략)…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성의 관점으로부터 여성, ‘나’를 정의하지 말고, 서구(이성애자, 백인, 비장애인, 부자, 서울 사람……)와의 관계로부터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다르게 그래서 즐겁게 살며,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 나가기를 원한다. ‘진정한 우리’, ‘진정한 여성’은 없다.

 -24~26쪽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편견은 …(중략)…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마오 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빗거리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못 견뎌한다. …(중략)…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과학적’ 여성운동은 여성을 불쌍한 피해자로 재현하여 시혜자인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이런 사고 밑바닥에는 남성만이 보편적 인간이며 절대 주체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당위가 깔려 있다.

 -39쪽.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서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40쪽


그는 “페미니즘은 자기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는 불쌍하다, 남자도 피해자다……. 이렇게 남자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중략)… 한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가부장적 신념이 강한 사회인데도, 왜 남성을 “약하고 불쌍하다,”고 이야기할까? 왜 그토록 남성들은 ‘열등한’ 여성들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할까? 혹 이러한 ‘응석’이 남성의 성장과 우리 사회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는 피해자가 직접 말하는 것, 사회적 약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여성뿐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학벌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이들이 지배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라도 내려 하면, 그 작은 소리마저 ‘폭력’이라면 흥분한다.

나는 그 남성의 ‘충고’를 결코 ‘대중적 전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는 5천 년 이상 계속되어 온 남성 사회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전략’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비대하며 단일한 기존의 목소리를 더욱 강화시킨다. 또한 그러한 요구는, 모든 부분에서 여성보다 이성적·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에 놓는 것처럼 남성 스스로가 자신을 여성과 동등한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마치 ‘성장이 멈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유일한 것으로 군림해 온 목소리가 조금 낮아질 때, 비로소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가부장제지, 여성의 ‘직설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이다.

-41~43쪽


남자들끼리 연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오가는 얘기는 ‘(여자와) 어디까지 갔냐’일 것이다. 손 잡기, 키스, 애무, 성(교)관계……, 섹스‘까지’ 했다면 흔히 ‘갈 데까지 갔다’고 말한다. 갈 데까지 갔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남성 문화는 남녀 관계의 진도를 대화나 가치관의 공유보다는 상대 여성의 몸에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중략)… 섹스가 남녀 관계의 종착역이라면, 섹스 이후 두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 종착역에서는 버스에서 내리거나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체계에서, 갈아타는 사람은 남성이고 여성은 ‘버스’로 간주된다. 누가 상처받을까?

 -94쪽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중략)…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아내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124~125쪽


계급·지역·학벌·성별 제도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지배 규범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순간 타인을 설득하는 위치에 서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정치적 입장의 전부는 아니다. 사안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 계몽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계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급 문제에서는 진보적인 사람이 여성 문제나 지역 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있고(실제로 대개 그렇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성별 문제에는 예민한 편이지만, 서울토박이, (아직까지는) 이성애자, 비장애인으로서, 내가 ‘편리’와 권력을 누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간혹 ‘가해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다.

문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進步) 않고 멈춘다면(守舊),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 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시니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새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이것은 폭력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129~130쪽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인권의 시각에서 정의되거나 문제화되지 않고, 가족주의, 민족주의 등 남성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중략)… 예를 들어, 여아 낙태는 여아의 생명권과 어머니 여성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성비 불균형으로 ‘남자들이 장가 못 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신대 문제는 피해 여성의 인권이 아니라 민족의 수치를 중심으로만 논의된다.

 -169~170쪽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전환자이든, 성기 삽입이든, 이물질 삽입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권침해이고 성폭력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사유재산권’ 침해―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 때문에 성폭력 특별법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강간은 처벌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 가능한 부녀자’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대문이다.

 - 171쪽


여성 폭력은 언제나 피해 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중략)…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남자 앞길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중략)… 사회적으로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171~172쪽  


비장애인 남성 성기 중심적인 섹슈얼리티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대변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나 장애인들은 기존의 성을 실천할 몸이 없는 성적 타자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성적 주체가 아니라 남성을 위한 성적 대상이거나 무성적(asexual)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장애 여성, 비장애 여성, 장애 남성은 비장애 남성 섹슈얼리티의 ‘공동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인권 개념의 재구성은, 이제까지 지배 규범이었던 비장애 남성 섹슈얼리티를 “우리도 똑같이 하자.”고 할 때가 아니라 성적 타자들이 연대하여 대안적인 성문화를 생산할 때 가능하다. 즉, 남성의 ‘성을 살 권리’를 비판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비장애인 여성의 인권과 장애 남성 인권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다.

 -175쪽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의 성이 가족이나 국가 등 남성 공동체의 소유가 아니라 여성에게 속해 있다는 주장으로 …(중략)… 여성도 남성처럼 개인의 위치로 승격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별 제도, 젠더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주장과 모순된다. 여성이 성적인 권리를 스스로 결정,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서는, 성폭력 피해의 책임 역시 여성이 지게 된다.

또한 기본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은 비장애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논리이기 때문에 장애 여성이나 여자 어린이, 여성 노인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 …(중략)… 장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의 의미와 내용이 비장애 여성의 그것과 같다고도 할 수 없다. 특히, 성적 자기결정권이 자유주의적으로 해석될 때 ‘10대 원조 교제(청소녀 성매수)’, ‘자발적 매춘’, ‘낙태’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마음대로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한 결과로 이해되기 쉽다.

…(중략)… 즉,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은 근대 자유주의의 남성 논리를 비판하기보다, 기존의 논리에 여성도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는 여성의 삶에 기반을 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성주의의 최종 목표라고는 할 수 없다.

 - 176~178쪽


남성들은 ‘양성 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은 경시되고 비하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수치와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178쪽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한 조건에서 달리기를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앤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179쪽


남성과 달리 여성은 능력이나 자원보다 나이와 외모가 계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젊어서 나이 든 남성에게 선택될 가능성 때문에) 10대, 20대 초반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권력이 많다. 그러나 (물론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대쯤에 이르면 여성과 남성의 권력은 비교 불가능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젊고 예쁜 여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190~191쪽


어떤 의미에서 성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개인이 그 사회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조건의 사람―남성이 연상인 미혼의 젊은 중산층 선남선녀의 이성애―들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타자들―장애인, 노숙자, 나이 든 여성들―에게는 성과 사랑의 욕망이 없다고 상정하기 쉽다.


성판매 여성은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다. 성판매 여성은 인간의 성 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 섹스로 환원되고, 상업화된 성과 이성애 가족 제도 내부의 성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범주다. 사회는 “‘사창가’라는 집단적 공간에서 평생 전업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를 성판매자라고 생각하고, 여성주의 진영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략)… 몇 번 혹은 몇 년을 성 산업에 종사해야 성판매자인가? 성판매 후 대학에 진학한 여성은 ‘성판매 출신’이고, 대학 재학 중에 ‘오빠(사장님)’에게 돈 받으면 ‘여대생 출신’인가? 내가 아는 어떤 ‘언니’는 탈(脫) 성매매 후 여성운동가가 되었지만,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고 생계가 막막해 간간히 성매매를 한다(솔직히 나는 그녀가 탈 성매매후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지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여성운동가인가? 성매매 여성인가?

- 207~208쪽

 

가장 큰 문제는, 남자들이 그 많은 시간을 남자들과 보내면서도 그들 내부에서 친밀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여성에게만 그것을 전가,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절대 여성에게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배운다. ‘진짜 인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의 일생 중,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가 유일하다. 결혼하면 남자들이 돌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17쪽


사회는 남성의 성 구매 이유를 ‘성욕 해소’라고 주장하지만, 실상 많은 경우 남성의 성 구매는 보살핌받고 싶거나, 본인의 노동과 고뇌로만 가능한 인간관계를 손쉽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218쪽


“성매매 근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창녀’와 주부의 차이는 일시불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등의 일상적 연설은, 성매매 제도 유지를 희망하는 남성의 시각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과 노동, 성매매가 쉽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여성의 노동은 성애화(sexualized)되었고, 여성의 성은 매춘화되었다.

한국 사회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뿐 아니라 교사, 스튜어디어스, 간호사, 음식업소 종사자, 사무직 여성 등 성산업과 관련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에게도 일상적으로 ‘여성으로서’의 규범을 노동 조건으로 요구한다. 여성 노동자에게는 동료를 위해 커피를 끊인다든가, 모욕적인 성적 폭언에 ‘여유 있게’ 대응하라고 주문한다든가, ‘애교’와 같은 성애화된 의사 소통을 요구한다. 주류 판매업소의 댄서, 노래방 도우미, 나레이터 모델, 출장 마사지사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산업과 성매매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 223~224쪽


사회 일반의 '여성의 성을 사는 태도'의 변혁에 비하면 성기 중심의 성매매에 대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게 아닐까? 실질적으로 노동시장에 있는 거의 모든 여성이 성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데 매춘 여성의 범주를 나누는 것이 유의미한가? 사실상 거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팔고(본의든, 본의 아니게든), 거의 모든 남성이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구매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이 구조 자체를 변혁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by sonofspace | 2008/10/25 14:29 | 책 속의 한 구절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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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Phaidros at 2009/09/26 19:10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좋을런지요...

"성기 중심 성매매"란 무슨 뜻인지요?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성매매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실질적으로 노동시장에 있는 거의 모든 여성이 성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데 매춘 여성의 범주를 나누는 것이 유의미한가?"라고 하셨는데 여성이 성적인 역할을 맡으면 그것이 곧 성을 판다는 것을 함의하게 되는지요? 많은 여성분들이 공장에서 볼트를 조이고 계십니다. 그 분들은 어떤 성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지요? 또 어떤 의미에서 성을 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요?

"사실상 거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팔고, 거의 모든 남성이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구매"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남녀 관계 일반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결혼 관계 일반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혹은 다른 어떤 관계를 상정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고 님께서 생각할 때 어떻게 해야 여성은 자신의 성을팔지 않고 남성은 그 성을 구매하지 않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요? 서로 팔고 사는 관계가 아닌 진정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남녀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로 구현될 수 있을까요?

질문이 좀 번잡스럽긴 합니다만... 암튼 미리 감사드립니다. 꾸벅.
Commented by sonofspace at 2009/09/27 02:25
섹스를 매개로 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매매라고 부르는 것을 성기 중심 성매매라고 지칭했습니다. 여성이 단지 술시중을 드는 토크바 같은 좀더 폭넓은 의미의 성적 매력의 거래와 대비하는 의미입니다. 섹시한 옷을 입고 판촉 활동을 하는 여성들이나 모터쇼의 레이싱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관상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성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 듯 보이지만, 공장의 관리인이 여성에게서는 유순하고 순정적인 태도를 기대하고, 그 때문에 여성을 고용한다면(노무 관리의 편이를 위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모든'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일반적인 직장에서도 여성들에게 여성다운 매력을 바라고, 또 여성다운 매력이 있다면 사는 데 유리해지죠. 단적으로 말하면 예쁘면 뭐든지 유리하잖아요(외모와 상관없는 스포츠 선수조차)?
거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본의 아니게 팔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꿀벅지'에도 성적 의미가 담겨 있고 그 기획사는 유이의 섹시한 허벅지를 강조해서 팬을 모으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는 그것도 '성 매매'가 아닐까요. 대부분의 걸그룹이 자신들이 성적 매력을 무기로 엔터테이먼트 시장에 뛰어들고 있죠. 우리의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죠. 우리는 이왕이면 예쁜 여자가 있는 식당에 가니까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행위일지 모르지만 만약 종업원 여성의 미모를 광고해서 손님을 모으거나, 종업원을 뽑을 때 외모를 중요하게 본다면 그것도 성을 상품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성을 상품화하지 않을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면 조금은 진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Phaidros at 2009/09/27 11:34
답변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원글의 태도(정희진씨와 님)는 성을 지나치게 관념화시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글에서는 성을 사고파는 행위의 대상, 즉 거래의 대상, 즉 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으로 인간 사회의 현상이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관계의 많은 경우가 주고 받는 관계이고, 그 주고 받는 관계에 거래나
판매와 구매라는 관념을 부여하면 원글에서와 같은 논리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맹점은, 제 생각에는, 실천에 있어서 별 힘을 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의 마지막 질문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성을 상품화하지 않은 진정한 관계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님께서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
그것은 원글의 논리가 현실을 비판하는데만 유능하지 실천에 있어서는 무능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원글의 논리가 관념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논리를 극단적으로 취하면,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취업하는 것)은 성의
상품화 함정에 빠지기 쉬우므로 성의 상품화 방지를 위해 여성은 가정에 머물러야 한다, 는
주장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관념 조작이 보여주는 어폐의 한 예일 것입니다.

사실 원글의 인용 부분에서도 이런 관념성을 한무더기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성이야말로 사람들이 한국의 여성주의운동을 중산층 여성의 운동이라고
치부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서 "중산층"이란 말을 쓰는 이유도, 그 이론의 생산자가 중산층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론이 현실과는 별 접점을 갖지 못하고 관념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 말로 하자면 "부르조아 사회주의"식의 표현이 되겠지요.
저는 심지어 거기서 중산층 여성들의 배타적 자아를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혹 시간되시면 제가 쓴 http://phaidros.egloos.com/2898121라는 글을 읽어봐 주십시오.)

암튼 진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좋은 일요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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