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풍경.


오늘 출근길 지하철 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쌍용차 직원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장에서 농성을 하고 계시는 정리해고 대상자 분이 아니라, 흔히 '사측'이라고 하는, 정리해고의 칼날에서 벗어난 직원 분이었습니다. '불법 폭력 파업을 중단하고, 경영 정상화를 이루자'는 투의 피켓을 들고 계셨고, 지금 평택 쌍용 자동차 공장에는 '외부세력'이 들어와 있어서 더 이상 쌍용의 노동자들이라고 볼 수 없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전단지에는 무시무시하게 머리가 깨지고 코뼈가 내려 앉은 쌍용차 임직원들의 사진이 있었고요. 물론 전 이 외부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온 금속노조 등이죠.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밖에서 왔으니 외부세력인가 봅니다.

때마침 오늘자 조선일보에는 눈물 겹게도 pc방에서 신차 개발을 하는 '
쌍용차 두뇌들'의 사정이 맨 앞 면에 실려 있더군요. 이 신문을 아는 사람이라면 쉬이 짐작할 수 있게, 개발팀들은 피땀흘려 가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공장을 점거한 노조 때문에 쌍용차가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의 이런 문구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회사가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번에 노조의 폭력행위를 접하고는 심한 충격과 회의에 빠졌다"  "그렇다면 월급 한 푼 못 받으면서 협력업체 사무실을 떠돌며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하는 우리들의 눈물은 누가 알아주느냐" 물론 이들의 눈물겨운 사정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의 위기도 신경 쓰지요. 자동차 전문가들이 더 걱정하는 것이 있다. 쌍용차의 마지막 남은 자산이라고 할 연구인력과 기술 노하우가 망가지는 것. 제품기획·설계부터 부품조달·설비·생산·판매·AS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전 부문을 지난 20년간 다뤄봤다는 것은 아무리 거대자본을 투입, 새 회사를 만든다 해도 단기간에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렇지요, 그렇게 중요한 산업을 '상하이차'라는 먹튀 자본에게 통째 넘기고 기술 유출을 수수방관했던 것이 잘못이었죠. 그간 상하이차로부터 신차 개발비는 지원받지 못하고, 귀중한 기술만 유출되다가 이제 그들은 떠나고 위기의 쌍용차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천여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함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네요. 마치 그러면 나머지는 다 살 수 있다는 듯이...그렇게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지하철역에서 노조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알리시려는 직원분도, pc방에서 신차 개발을 하며 회사 회생에 사활을 걸고 계신 개발팀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쌍용차'라는 이름 아래 살고 있고 거기에 의존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 공장을 점거하고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모두 여기밖에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노동자라는 게 해고는 죽음과 다를 바 없으니까(오늘 쌍용차 희망퇴직자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하더군요).. 모두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필사적인 것이겠지요.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데는 모두다 한마음이겠지만 입장이 다르니 안타까운 대립이 이어집니다. 그래도 전 '우리들은 살아야겠으니 너희들은 나가라'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전 그것이 비록 법에는 어긋날지라도, 공장을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전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말에 결자해지라고들 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올바른 도리이겠죠. 이미 많은 언론에서 지적했듯이 쌍용차의 위기는 대주주였던 상하이차가 투자를 도외시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 상하이차에게 51퍼센트의 지분을 매각한 정부의 잘못이죠. 그러나 이제와서 상하이차는 손을 털고 떠났고, 정부는 수수방관하며, 그 책임은 오로지 노동자들이 지게 되는 모양새입니다. 자본도, 권력도 멀쩡한데 노동자만 죽어나게 생겼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노사정 합의라는 허구적 기만을 봅니다. IMF 시절, 재벌들의 무분별한 문어발식 팽창 경영으로 경제 위기가 왔지만 피해를 입은 건 해고당한 노동자였을 뿐 대부분의 재벌들은 멀쩡했듯이, 아니 오히려 그때를 기해 진행된 노동유연화와 경영효율화 덕분에 더 많은 부를 축적했듯이... 언제까지 이렇게 노동자들만 피해를 봐야 할까요, 언제가 되야 기업에 닥친 경영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가 아니라 CEO와 대주주들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책임 있는 정부라면 쌍용자동차 정상화와 노동자 보호의 방안을 강구해야 할테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모로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아니군요, 공권력 투입으로 사측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군요).    


두려운 것은 결국은 유혈 사태와 함께 노조가 해산되고 정리해고가 단행되는 일입니다. 공장을 점거한 노조의 폭력성에 대한 부각, 그래도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치졸하지만 감정적인 논리, 사정은 안 됐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무기력하면서도 무서운 납득, 국가 경제를 걱정하는 대책없이 오지랖 넓은 사람들의 국가주의, 이 모든 사정들이 노조의 입장을 약화시키고 여론을 강제 해산 쪽으로 몰아가겠죠. 이런 '논리'들이 해고 상황에 놓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상상해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쌍용자동차의 회생과 국가 경제 발전을 막는 불순분자로 여기게 만들겠죠. 그렇지만 "그럼 다른 방안이 있냐? 다같이 죽자는 거냐?"라는 성토도 "왜 하필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가? 사태를 이렇게 만든 상하이차도, 정부도 경영진도 그대로 있는데"라는 정당한 항변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자 사태의 해결의 열쇠를 진 정부는 뒷짐지고 방관하는 사이에 노사 갈등과 노노 갈등만 극한으로 치닫고 있고 쌍용자동차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져갑니다.

by sonofspace | 2009/07/03 18:38 | 트랙백 | 덧글(2)

[인생의 만화들] 인간이야말로 <기생수>다!

"지구상의 누군가가 생각했다. 인간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많은 종들이 살아남을 수 일을까?" 이와사키 히토시의 출세작 <기생수>는 이런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질문으로 독자들을 고민에 빠뜨리며 시작합니다. <기생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왠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상을 한 번쯤 해봤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이 없다면 자연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에게 해만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왜 태어난 걸까?" 당시 일기 시작한 자연파괴, 환경파괴의 문제를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져봤을 겁니다. 이와사키 히토시는 이런 의문을 발전시켜 <기생수>라는 훌륭한 만화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는 이 만화에서 인간의 존재의의를 의심하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한 번쯤 인간이라는 생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환경을 고민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은 해봤을 것이다.)

사실 이와사키 히토시는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못 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작인 <히스토리에>에서도 그림은 그다지 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태생적인 문제라고 보입니다. 컷 사용은 답답하고, 액션은 역동성이 떨어집니다. 전투는 박진감이 없습니다. 인물의 표정 묘사도 감정을 잘 전달해주지 못하고 캐릭터들의 매력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와사키 히토시는 이런 단점을 모두 무시할 만큼 강력한 내러티브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생수>, <칠석의 나라>, <히스토리에>까지 국내 발간된 이와사키 히토시의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인상적인 캐릭터들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작가는 그림이나 캐릭터성에 의존하지 않고 이야기 자체에 집중합니다.

<기생수>는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뇌를 차지하여 인간을 잡아먹는 '기생생물'이 출연하면서 시작합니다. 기생생물이 무엇이고 어째서 출현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이야기 구조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떡밥으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화의 첫 장에 등장하는 나레이션들은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인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오염 물질도 절반으로 줄어들까... 지구상의 누군가가 생각했다. 모든 생물들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이런 문장 뒤에 곧바로 기생생물이 등장하는 내용 전개를 보며 독자들은 인간이 지구에 대한 '기생생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줄어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과격한 질문을 던지게 되며, 작가가 던진 고민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런 고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주인공 신이치입니다. 우연히 기생생물이 뇌를 차지하지 못해 오른손에 기생하게 된 신이치는 기생생물 '오른쪽이'와 같이 살아가면서 기생생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점차적으로 신이치는 여러 면에서 기생생물처럼 변해갑니다. 조금씩 신이치는 마치 '기생생물'처럼 다른 인간들을 생각하게 되며 그 사실에 괴로워하죠. 어머니에게 기생한 기생생물에게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이런 정체성의 갈등은 더욱 깊어집니다.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를 죽인 기생생물에게 당한 상처, 그리고 복수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이치는 많은 부분 '인간다움'을 잃어버립니다. 실제로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생생물은 '오른쪽이'의 세포가 신이치의 몸속에 섞여 들어갔기에 신이치의 이런 '기생생물화'는 물질적으로도 진행됩니다. 신이치가 이후로 아무리 슬픈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역설적으로 신이치가 눈물을 되찾게 되는 것은 기생생물을 통해입니다. 그 계기인 기생생물 타무라 레이코의 최후는 만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성을 추구하는 기생생물인 타무라 레이코는 실험의 방편으로 인간의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합니다. 생식 능력이 없으며(아이를 임신할 수 있던 것은 인간의 몸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기는 기생생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을 오로지 먹이로만 생각하는 기생생물이지만 놀랍게도 타무라 레이코는 조금씩 '모성애'를 느끼게 됩니다. 경찰들에게 포위당한 마지막 순간에 타무라 레이코는 자신의 도주보다 아기의 안전을 우선해서 생각하고 아기를 총탄으로부터 보호합니다. 혼자서라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기를 지키기 위해 무수한 총탄을 받아내며 신이치에게로 걸어가는 장면은 <기생수>의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신이치는 그녀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며, .'인간의 아기'를 건네받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건네받은 것은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돌아왔어, 눈물이..."라는 대사는 어쩐지 저에게는 "돌아왔어, '마음'이..."라고 들립니다.



(기생동물인 타무라 레이코가 자기 아이를 지키는 모습은 더없이 감동적이다. 신이치는 이런 모습에 과거에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가'라는 처음의 문제의식은 끝까지도 강렬히 남아 있습니다. 이 만화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는 인간임에도 기생생물의 편에서서 인간을 줄이는 데 협력하는 시장입니다. 모든 생명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는 시장의 일갈은 우리가 인간임에도 분명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신이치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우리 역시 생명이고 살고 싶기 때문이죠. 만화에서 신이치는 어떤 대의명분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살기 위해 싸웁니다. 사실상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환경을 지키고 자연을 보호해야만 할 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만화 중의 대사처럼 우리는 "우리가 외롭기 때문에 다른 생물을 신경쓰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을 보호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비록 순전히 인간 중심적일지라도, 종(種)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으로도 환경 보호라는 목적에 충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더해서 인간은 다른 종을 의식적으로 배려하고 신경쓸 수 있는 유리한 생물이기도 합니다.


<기생수>는 인간을 부정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는 인간다움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는 데 있습니다. 작가는 기생생물인 '오른쪽이'의 말을 빌어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도 눈물 흘리고, 다른 사람 또는 생물을 아끼고 배려하는 '여유'가, 어찌 보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약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마음이 인간의 멋진 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장점이라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인간을 부정하며 시작한 이 만화는 최종적으로는는 인간을 무엇보다도 강하게 긍정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자신과 상관 없는 생명의 죽음에도 슬퍼하는 것, 저 또한 이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인간의 모든 추악함에도 가려지지 않는 보석 같은 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가'라는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물음은 모든 생명은 지구에 의지하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다른 방향의 통찰로 결론을 맺는다.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겠지만 그건 인간만이 아닐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점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by sonofspace | 2009/06/17 22:25 | 트랙백 | 덧글(3)

노무현 시대의 마감과 과제.

 

바람이 분다. 2002년 대선 때처럼, 2004년 탄핵 때처럼 다시 노무현이라는 바람이 분다. 정국은 크게 바뀌었고, 모든 정당이 추세를 주시하고 있다. 노무현은 갔지만 그가 남긴 파장에 사람들은 고민하고 갈등한다. 언제나처럼 질문은 이렇다.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


1. 노무현이라는 시대정신

2002년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이회창 지지자를 제외한(그리고 소수의 이인제 등의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권영길을 지지한 민노당원들도 그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선일보 등에서 '진보'내지 '좌파'라 지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했다. 노무현의 승리는 변화에 대한 열망의 승리였다. 엘리트주의, 지역주의, 수구세력, 경제적 불평등, 부패, 굴욕적인 친미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의 승리였다. 나는 노무현을 당선시킨 시대정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화, 개혁, '사람다운' 세상.    

난 지금도 이 시대정신은 옳다고 생각한다. 당시 노무현을 찍은 사람들은 사회고위층들의 병역 비리가 없는 세상을, 미군의 범죄를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는 사회, 더 나아가 자주적인 국가를, 기득권자들의 특권과 전횡이 없는 세상을, 친일파를 처벌하기를, 북한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나라를 바랐다. 자유를, 평등을, 평화를, 자주를 바랐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길 바랐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투철한 인권변호사였고, 독재자에게 일갈을 서슴지 않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공박하고, 피해볼 줄 알면서도 소신을 지킬 줄 았았던 멋진 정치인은 그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바람은 그때도 옳고 지금도 옳다. 노무현이라는 바람은 이런 바람에 근거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많은 좌파들도 그의 승리를 기뻐했던 것이다. 그의 승리는 한국 사회가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독재 재벌 냉전 수구 세력과 결별하고 좀더 균형잡힌, 적어도 당시보다는 '왼쪽'으로, 사회, 좀더 민주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향하게 되었다는 상징으로 보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이런 바람이 좌절되었다는 상징으로 여겨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 그러나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이 '사람다움'이나 '상식'이란 무엇인가? 이 말들은 굉장히 듣기 좋고 아름답지만 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막말로 이명박 대통령도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한다(믿어주진 않겠지만). '진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의 사회주의적 좌파들만 아니라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민주당까지도 스스로들을(그리고 공통의 반대 세력인 조중동 또한 그들을) '진보'라고 지칭한다. 물론 그들이 한나라당보다야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엄격히 따졌을 때는 엄연히 다른 이들 진영들이 뭉뚱그려져서 대충 '진보'라고 칭해지고 인식된다. 그리고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분명히 일정 부분 진보의 한 일파로 인식되고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민주노동당의 일부 지지자들은 그런 인식으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었다.

이런 동상이몽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이미지가 아니라 정책이니까. 참여정부의 정책 중에는 좌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좌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적 재분배에 대한 부분이 없었고, 오히려 이를 그저 시장의 자유에 맡기는 성향이 강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고백은 명백한 현실을 인정한 발언이었지만 그는 권력을 시장으로부터 찾아와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좌파들은 바로 그러기를 바랐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비정규직 법안과 한미 FTA로 노무현 정권은 진보 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명박의 반동에도 이런 차이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다르다. 노무현이 생각했던 '사람다운 세상'과 좌파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어느 정도 겹치고 교차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그 길은 가는 곳이 다르다. 그 점을 명백히 하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둔다면 언젠가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선을 그을 건 분명히 그어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민주 사회에 사는 만큼 이 다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을 추구하고, 지지자를 끌어들이고, 활동을 하면 된다. 당연히 이 복잡한 세상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의 적합성, 얼마나 더 세상에 더 도움이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지가 이런 주장들의 우열을 가릴 것이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추구하며 때론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한두 사안에서 의견이 같다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단순함과 안이함에서 나온다. 여전히 반독재 대동단결을 외치는 사람들도 물론이거니와 과거 좌파들도 그런 실수를 했었다.


3. 어부지리는 그만두자

참여정부 후반기 중산층 경제가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보수 정당과 언론이 당시 참여정부를 공격하며 진보좌파를 '무능력' '실용성 없는 이념 논쟁' '경제 파탄'이라는 색깔로 덧씌우고 있을 때, 속칭 '진짜' 진보들에게서 '우리는 쟤네들(참여 정부)과는 다르며 쟤네들은 중도 우파에 불과하다'는 볼멘 소리가 나왔었다. 그러면서 '진짜' 진보가 도매급으로 하향 평가를 받고 있다며 참여 정부의 실정을 누구보다 강력히 비판했다. 물론 이 말은 옳다. 친노 내지 열린우리당, 민주당의 지향은 민주노동당과의 지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이런 반응은 훨씬 더 일찍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2002년 대선 때부터 노무현도 똑같은 우파 후보일 뿐이라고, 이회창이 되는 노무현이 되든 방식이 다를 뿐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운동 단체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성공이 이어졌을 때는 '진짜' 진보들조차도 뭉뚱그려서 '진보'라고 취급받는데 만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보단 좀더 일찍 선을 분명히 긋고 차별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현실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 않았을까?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최대의 득표를 얻은 것은 2004년 총선 때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최대 당이 되었을 때였다. 솔직히 생각해봤을 때 이 13퍼센트에 달했던 지지도가 민노당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당시 민노당은 탄핵 역풍을 어부지리로, 숫째 공짜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동반해서 상승한 지지율은 몇 년 후 마찬가지로 동반해서 추락한다. 민노당을 열린우리당과 차별화하고 자신만의 지지층들을 구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진보 쪽의 사람들은 때로 열린우리당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사실은 유권자들이 민노당을 열린우리당의 2중대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실제의 노력과 생각이야 어떻든 결과적인 현실은 그랬다.

당시에 진보 세력은 안이하게, 자신들의 높은 득표율을 보며 시대의 흐름이 진보 쪽으로, 좌파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또한 작년의 촛불을 보면서 그리고 노무현 추모 정국을 보면서도 자신들에게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지만 까놓고 말해, 이런 대규모의 사회 변혁에서 '진짜' 진보들이 맡은 역할은 거의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촛불 이후에도 진보정당의 역량이 강해졌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어부지리로 뭘 얻을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얻은 지지가 쉽게 사라진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어떤 누군가가 일으킨 바람이 아니라 보다 가능성 있고 성공적인 비전, 진짜 진보만이 제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비전을 제시하고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못 얻으면 역량이 부족한 거고. 누구 때문에 안 되고, 무엇 때문에 안 되고.... 그런 건 이제 그만두자. 난 조금 더 겸허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이명박이라는 시대정신  

기억해야 할 것은 노무현을 선택한 시대정신이 5년 후에는 이명박을 선택한 시대정신으로 바뀌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탄핵 이후 10퍼센트대 지지율로 전락한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에서는 과반수를 넘는 의석수를 획득했다. 게다가 이명박은 2002년의 이회창보다도 더 부패하고, 무식하고, 폭력적인 인물임에도 그렇게 되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경제 성장에 대한 맹신으로 바뀌었다. 정의라는 이름은 집값 상승이라는 판타지에 가렸다.

보수 언론의 공세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잃어버린 10년'은 완전 헛소리이고,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서민들은 실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느꼈다. '노무현이 경제를 망쳤다'는 소리가 설득력을 가졌던 건 정말로 당시에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노동 소득보다도 집값, 주식, 펀드 등으로 더 큰 수입을 챙기는 모습들을 보고서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중동의 헛소리가 먹히는 데는 대체로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 그리하여 자유, 평등, 평화, 자주를 요구하던 사람들은 불과 5년 만에 성장, 성공, 취업, 부자되기라는 가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국개론'이라는 치사한 개념을 도입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가 아닌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노무현 정권 말기~17대 대통령 선거 이후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논리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시대정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명박뿐만 아니라 모든 후보들이 경제 살리기(=성장)이라는 프레임에 갖혀 있었고 다수의 유권자들은 그 일을 이명박이 가장 잘 하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 역시도 한미 FTA로 대변되는 성장 위주 정책과 '최고의 복지는 곧 일자리'라는 식의 복지 개념을 추구하면서 이런 시대정신의 창조에 일조했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 모두의 한 내면이다. 우리는 모두들 좀더 나은 사회를, 정의롭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원하는 한편으로 나만은 잘 되길, 내 집값만은 오르고 내 주식만은 오르고 내 자식만은 잘 되길 바라고 있으니까.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 많은 부동층들은 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때그때의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현재의 뜨거운 추모 열기도(지금은 약간 가라앉았지만) 사실 언제 또 변할지 모른다. 지금은 조중동과 한나라당이라면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언젠가 다시 한나라당을 찍게 될지 모른다. 한나라당의 약 35퍼센트가량의 고정 지지율은 우습게 볼 게 아니라서, 그 숱한 비리와 위기에도 한나라당이 존속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현재의 정치 세력들이 (대중들이 보기에)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을 흔들고 부동층을 정치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정치 지형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바람은 풀을 눕힐 수 있지만 풀을 뽑거나 땅을 바꾸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개간만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니라 정말로 정치적인 행동만이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다.    


5. 정치, 정치, 정치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유산을 두고 서로 잇속 계산을 하고 있다. 서로 노무현의 '적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고생들 하고 있다. 가장 같잖은 건 민주당이다. 불과 1년 반 전에 참여정부의 과실을 회피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버리고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간 주제에 영원한 '우리의' 대통령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정동영은 적자가 될 수 있나? 아니, 절대.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고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미미한 부산에 출마했고, 그 일은 오랫동안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정동영은 탈당을 하고 깽판을 치면서 고향인 전주로 돌아가 '전주의 아들' 어쩌고 하고 나자빠지니 글러먹었다. 아무래도 유시민을 비롯한 친노 세력이 그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하길 빈다. 한나라당 같은 짝퉁 시장주의가 아니라(실상은 친 재벌주의) 제대로 된 자유시장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을 하나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난 그 이념에 반대하고 좌파도 진보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런 세력이 존재하는 한 정치적 다양성이 표출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유산이 아니라 부채인 셈인데 물론 이 사람들은 갚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갚을 생각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대가리가 말을 안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악성 채무자다. 배째라고 들이눕는데 째지도 못하고...언젠가는 정말 째야 할 것이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군소정당은 사실 유산도 부채도 없다. 말한 대로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이랑 같이 취급당해서 무능하다는 꼬리표가 달렸다고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노무현이 아니라 보수 언론의 프레임이 그렇게 만든 거였고(노무현도 괜히 민노당이랑 동급의 좌파 취급을 받아서 억울했을 듯하다), 차별화를 못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물려받을 것도 없고, 갚을 것도 없다. 그의 생전에도 그랬듯이 그가 추구한 정책 중 옳다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그르다 여기는 것은 여전히 비판하고 거부하면 된다. 물론 이명박의 정책 중에서도 옳은 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개인적이라면 모를까 노무현과의 정치적인 은원 관계 같은 건 이미 예전에 끝났다. 자신들의 길을 꿋꿋이, 역량을 조금씩 착실하게 키워가며 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친노든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들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누가 당선되든 나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정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는 현재는 진보의 위기보다도 민주주의의 위기보다도 정치의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토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마주한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정치에 있지 않고 시장에 있는데 대체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정치와 선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무력해진 정치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을 부르고  이명박이라는 정치색이 없는 (자칭) 실용주의자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기여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엄연한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정치의 무기력과 공백은 지속되리라 생각한다. 비난과 증오, 진흙탕 싸움으로 점철된 정치의 위기를 넘어 정말로 이념에 충실한, 그러면서도 정말로 실용적인 정치를 구축하는 것이 노무현 시대 이후의 과제일 것이다.   

by sonofspace | 2009/06/08 21:08 | 트랙백 | 덧글(6)

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며

물론 나는 잊지 않는다. 서민들의 눈물의 힘으로 당선된 당신이 어떻게 서민들에게서 피눈물을 흘리게 했는지를.


"반미면 어떠냐"라고 당당히 말하던 당신이 다른 보수 세력과 너무도 똑같은 어투로  "국익을 위하여"라며 이라크에 파병을 결정했던 순간을 잊지 않는다(이 실체도 없는 국익이라는 것이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이 변명으로 나왔던가). 그때 국회 앞에는 수만 명이 있었다. 자유주의를 옹호하던 당신이 미군의 기지를 위하여 대추리의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낸 일도 나는 잊지 않는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외치던 김선일 씨의 죽음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신의 집권시 일어났던 비정규직 법안의 개악과 그로 인해 비정규직이 늘어났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이 당신만의 잘못은 아니라도 당신은 그 일을 적극 협조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기묘한 어구까지 만들어가면서. 기득권자들의 강력한 무기인 손배가압류가 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도 당신 때였다. 수십 억에 달하는 배상금에 목숨을 끊어야 했던 배달호 씨와 김주익 씨를 나는 기억한다. 비정규직의 차별에 맨몸으로 영웅적인 저항을 한 이랜드의 여성노동자들과, 그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며 강제로 해산시킨 일도 기억한다. 아, 그리고 그때에도 얼마나 많은 탄압이 있었나.

  

농업 개방을 반대하며 멕시코 칸쿤에서 할복 자살을 한 이경해 씨를 기억한다. 또한 쌀 비준 반대 시위에서 경찰 진압으로 숨진 두 분의 농민도.


망국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한미 FTA의 추진도 역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한미 FTA는 안 된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른 허세욱 씨도. 당신이 적극 추진한 금융허브 계획은 오늘날 아이슬란드의 국가 부도 사태로 그 허망함을 드러냈다. 아, 당신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계획은 많은 사람들을,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것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죽음으로써 이 모든 것이 묻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모든 일들을 반성하게 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당신은 떠났고,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과 적어도 양심적이기는 했던 당신과 대비되는 후안무치한 후임 덕분에 냉정한 역사의 평가는 좀더 후대에 내려질 것 같다.


가족들의 뇌물 비리와 수사 이후 당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사망했었다. 그러나 당신은 자살로 모든 것을 덮고, 가족과 주변 인물을 구하고, 권력의 압제와 폭력에 희생당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그렇다, 실로 부활했다. 자살의 선택은 당신의 일생일대의,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최후의 승부수였을까?


당신이 의도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승리했다. 모든 부분에서 당신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했던 현정권이지만, 흔히 말하듯 죽은 자를 이길 수는 없다. 이제 정권은 탄압자, 학살자, 독재자의 이미지를 벗어버릴 수 없으며 당신은 숭고한 희생자, 영원한 '노간지'가 되었다. 앞으로 이런 당신의 정치적 상징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된다. 당신의 죽음을 이렇게 '정치적인 계산'으로 생각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대통령까지 했던 정치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람은 삶도, 죽음도, 사소한 행동도 모두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 당신도 당신의 죽음이 정치라는 것을, 그것도 가장 치열하고 민감한 정치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앞선 이유 때문에 당신을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신은 원망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었던 대통령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후임인 현 대통령을 생각하면 환멸밖에 안 나오니까... 내가 전해 들은 당신의 젊은 시절은 멋졌고 존경스러웠다. 양심과 불의에 분노하는 마음, 서민적 감수성과 소탈함이 있었다. 내가 지켜본 당신의 대통령 시절은 실망스럽게도 지나치게 기득권적이었고, 친미적이었고, 반서민적이었으며, 자본의 이해에 충실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깨끗했고,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하고, 공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는 않았다. 또한 비록 실패했지만 언론을 개혁하고, 검찰을 개혁하고,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려 한 시도는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은 당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패악한 인물에게 고초를 당했기에 안쓰러웠다. 그러다 끝내 목숨을 끊게 된 것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이렇게 갈 사람은 아니었다. 역사적인 과오와 성과 모두 평가받았어야 했다.


좌파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파적인 정책을 펼쳐 지지자들을 떠나보냈던, 그러면서도 봉건적인 수구세력과 대립했기에 우파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바보 같은 양반이 끝내 갔다. 후임자의 질투와 증오에 찬 보복 때문에. 안 된 양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내세가 있다면,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하길 빈다.  

by sonofspace | 2009/05/25 20:13 | 트랙백(2) | 덧글(51)

저는 그렇게 걱정이 되진 않네요.

출판사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네에, 전 그래도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첫 번째로 사적 이용의 문제인데요, 이건 우려처럼 복사집에서 복사하는 그런 경우는 안 생길 것 같네요. 왜냐면 개정안에서도 엄연히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란 부분이 있거든요. 복사집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진 않을 테니까 여기서 복사하는 건 법에 어긋나겠죠. 개정안에서는 "다만,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복제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부분을 삭제했는데 법적 지식은 짧지만 제 생각에 이건 공공기관의 복사기를 말하는 듯하네요. 복사집은 여러 명이 사용하긴 하지만 이걸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죠.

그리고 중요한 게 디지털 열람의 문제인데요, 개정안은 분명 다른 도서관과 가정의 컴퓨터로도 자유로이 열람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땡큐죠. 일부만 보기 위해서 책 전부를 살 필요가 없으니. 그런데 이게 출판사의 권리를 완전히 침해할지는 모르겠네요. 개정안의 31조 5항을 보면 "다른 도서관등의 안 또는 도서관등의 밖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복제하거나 전송하는 경우에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기준에 의한 보상금을 당해 저작재산권자에게 지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7항에는  "디지털 형태로 복제하거나 전송하는 경우에 도서관등은 저작권 그 밖에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복제방지조치 등 대통령령이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라고 복제방지조치를 담고도 있고요.

그리고 지금도 이미 발간 후 5년이 지난 도서에 한해서는 다른 도서관에서 열람이 가능합니다. 개정안은 이걸 도서관 밖까지 확대하는군요.


그리고 "
조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공표된 도서등의 일부분의 복제물을 1인 1부에 한하여 제공하는 경우" 이건 도서관 자체적으로 자료를 복제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조항입니다. 사적 이용은 지금도 자유롭고요, 이 항은 개정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제 생각에 이 법안은 개인이 집에서도 자료를 열람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작권자에 대한 보상도 밝혀 놓고 있고요.  

제 생각에는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을 듯... 문제는 외부로 대출될 때 저작권자에게 얼마큼의 보상을 해줄 것이냐(한 번 대출될 때마다 얼마씩이 좋을까요?) 정도일 것 같네요. 물론 저 보상은 세금으로 해야겠죠.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의 의무에 대해선...이쪽은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출판사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저 출판사 다닙니다. 일단 e북으로 책 보는 사람 자체가 사실 엄청 적고 그쪽 매출이 거의 미미하거든요(거의다 도서관 구매입니다). 그래서 e북을 아에 안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그리고 현행법이든 개정안이든 도서관은 함부로 자료를 디지털화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몇 달 전에는 대표적인 e북 업체인 북토피아가 몇백억 부도 크리 맞았었죠. 걱정스러운 면은 이런 거네요. 

현재는 누군가 "아, 이 책의 어떤 내용이 궁금한데...사기는 아깝고..." 하면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1. 그냥 산다 2. 도서관에서 빌린다

지금은 도서관에 가는 게 귀찮기 때문에 사는 사람도 있겠죠. 법이 통과되면 이렇게 바뀌겠네요.

1. 산다 2. 도서관에서 빌린다 3. e북을 대출한다

온라인으로 대출하는 건 쉽고 편하죠. 확실히 이러면 사는 사람이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건 문화적으로는 발전이라고 생각하네요. 저작권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면 환영입니다.

네 뭐 제 생각은 이 정도.









 



by sonofspace | 2009/05/21 18:28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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