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 씨,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정치'에요.

더럽혀진 정치

며칠 전 김제동 씨가 스타골든벨 MC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출연료와 오랜 출연 기간에 따른 개편이라고 합니다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제동 씨가 현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에 윗선에 의해 짤렸다는 짐작이 파다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사회나 쌍용자동차 등 사회적 현안에 대한 참여와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는 거지요. 사실이라면 정말 더럽고 치사한 일입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니까요. 하기야 이 정부에 원칙을 말하는 것이 입 아픈 일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저한테 더 흥미로운 것은 김제동 씨 소속사의 반응이었어요. 소속사인 다음기획의 김영준 대표가 다음 아고라에 글을 남겼습니다(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090707). 생각할 거리가 많은 좋은 글이더군요. 그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들이 특정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적극 옹호하고 전 국민적 관심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의견을 표명하거나 그가 가진 연예인으로써의 능력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행위를 정치적인 시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이들은 ‘폴리테이너’ 가 아니라 ‘소셜테이너’ 들입니다."


말하자면 김제동 씨는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전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여'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 국민적 관심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의견을 표명"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행위"는 과연 '정치'와 어떻게 다른 걸까?


물론 김영준 대표가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영준 대표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고, 구체적인 이념(사회주의라든지, 사민주의라든지, 자유주의라든지)을 표방하는 것을 '정치'로 규정하고 전 국민적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거나 활동을 하는 행위를 정치와 구분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아마 정치에 대한 이런 관점이 사회 일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작년 촛불 시위에서도 시위라는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난 정치적이진 않지만....' 혹은 '난 정치는 잘 모르지만...'이라고 운을 띄우며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 하면 정권을 잡기 위한 권력 투쟁이나 國K-1들의 집단 몸 싸움, 심하게는 부패와 비리, 뇌물, 거짓말 등을 연상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는 것을 거북스러워하고 싫어하는 듯합니다. 이런 경향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이게 갈수록 더 심해져서 요즘에는 선거에 출마하는 명실공히 분명한 '정치인'들마저 비정치적 이미지를 많이 내세우더라고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사실 그랬고,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인' 이미지가 아니가 'CEO'의 이미지로 대선을 치르고 승리하면서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선거에서 주요 후보군으로 예전부터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사회 인사가 꼽히고는 하고 있습니다. 작년 대선 때 바람을 일으킬락 말락 하다 주저 앉은 문국현 씨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정운찬 씨(아차, 이제 총리죠)가 대표적이죠. 그 밖에도 신선하고 '비정치적'인 외부 인사(기업가, 연예인, 학자 등등)를 수혈해와서 선거를 치르는 모습은 여러 정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이런 신선한 '비'정치인사들도 식상한 정치인이 되어 똑같은 일이 반복되곤 하죠. '정치'라는 단어는 심각하게 더럽혀져 있어서 이에 몸 담는 사람까지 더럽히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오해

전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정치'라는 행위의 범주를 정당 간의 정쟁이나 권력 투쟁, 기껏해야 투표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정당들 간의 경쟁이 보통 사람들과의 일상과 크게 괴리되어 있기에(혹은 괴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보통 사람들은 정치를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투표는 열성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기보다 고작 순수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나 자기 동향 사람, 자기 동문을 밀어주는 사적인 행위, 혹은 잘생기고 멋진, '이미지'가 좋은 사람을 뽑는 행위로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치의 정의는 <희망의 인문학>에서 저자 얼 쇼리스가 소개한 페리클레스의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말합니다. "제가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가족에서부터 이웃, 더 나아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정치'를 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과 의견과 행동을 공유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가 속한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정치는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그런 점에서 김제동 씨의 활동이 충분히 정치적인 활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소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고 공감을 구하는 행위는 더 할 나위 없이 정치적인 일입니다.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하고 가치 있는 행위입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너'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정치는 이루어집니다. 크게는 국가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작게는 우리 학교나 우리 동네, 또는 동아리나 클럽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규모가 어찌 되었든 자기 자신만의 독단을 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생각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누군가는 "그러면 대체 정치가 아닌 건 뭐냐?"라는 의문을 품을 테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은 정치다"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정치'를 나랏님들끼리의 자리 싸움이나 투표 행위를 넘어 더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잘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우리 스스로도 정치를 더 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 직후에 언론사 등에서 유권자들에게 새 정부에 바라는 점 등을 물어보면 많이들 '정치를 잘해주었으면'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옵니다. 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좀 찜찜한데 첫째는 '이제 나는 투표로 의무를 다했으니 나머지는 뽑힌 니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이고, 둘째는 '정치를 잘해달라'라는 말이 '나라를 잘 다스려달라'라는 봉건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서입니다. 어느 쪽이나 정치와 '나'를 분리하는 듯한 의미라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정치를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설득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폭력으로, 다수의 횡포로, 혹은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듣고 설득하고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올 초 비극적인 용산 참사에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는 폭력이 아니라 철거민들과의 협상과 타협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피해 유가족들과 정부와의 대화가 필요하건만 정부는 모로쇠로 일관하고 있지요.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수의 의견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직업적인 정치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연애에서처럼- 듣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수용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위정자들은 지독히도 들을 줄 모르고 말할 줄만 압니다. 반대 의견은 모두 '오해'라며, 자신들의 주장을 열심히 홍보(또는 세뇌?)하는 데 급급하죠. 물론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너무 잘 나신 분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권력을 잡으신 분들은 대체로 가는 귀가 먹고 행동력만 증가하더군요. 그런데 과연 일상의 우리들은 얼마나 '정치'를 잘하고 있을까요?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부모, 학생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교사, 부하직원의 의견을 듣지 않는 상사, 후배에게 강압적인 선배, 우리도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며 '꼰대짓'을 하진 않았을까요? 그런 것 말고도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무엇을 자발적으로 해본 경험은 얼마나 될까요? 한 집단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의견을 조율해본 경험은 얼마나 될까요? 무엇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논쟁해본 적은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이념' 논쟁이 문제고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이념 논쟁을 해본 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생각이 다른 것, 좌파다 우파다 갈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다른 의견과 사상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논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김제동 씨의 말을 가지고도 좌파다 빨갱이다 하고 마냥 미워하고 입을 막아버리려고 하는 거죠.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싫어하는 유아적 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의견을 들을 줄 아는 성숙한 태도를 갖추려면, 우리는 더 많은 논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말하듯이 정치적인 시민은 논쟁하면서 큽니다. 그렇게 다른 의견과 부딪히고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책임과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올랐을 때도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입을 닫게 해버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꼭 불도저같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사장 노릇하다 대통령이 된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정치 수업이 필요합니다.


더 정치적인 사회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알게 되고 조직력과 정치적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비슷하게 전 자치 활동이 정치적 시민의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하는 관료적 조직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과 질서를 유지해가고 다른 사람과 함께 활동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 감각-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판단하고 배려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울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작은' 정치에 숙달되면 '큰' 정치를 생각하는 틀도 발전하고 성숙해질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고 생각도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세상'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정치'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정의를 약간 변형해서 말해보자면, 정치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활동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당연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쉽게는 차별이라고, 또 더 진지하게는 '파쇼'라고 부릅니다. 불행히도 광복 후 수십 년간의 한국 역사에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왔습니다. 더욱 불행하게도 현재의 정부도 그렇습니다.


전 좌우로 갈리는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좌우로 갈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념과 사상이 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의식하고 있든 못 하고 있든 자기 나름의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는 너무도 지나치게 자신의 (사회에 대한) 생각을 감추고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른바 '공인'이라고 불리는 스타들의 사회적 발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하죠. 아마도 이런 경향 역시 자유로운 사상의 표출을 가로막았던 독재 시절의 유산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다른 의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대립되는 생각이 부딪혔을 때는 성숙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상대를 깔아뭉게고 대처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전 김제동 씨나 다른 '공인'들이 이런 '금기'에 도전해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행위를 좋아하고 지지합니다. 더 나아가 지지 정당을 밝히는 것도(방송에서 말고 개인적으로라면) 무슨 상관이겠습니다. 설령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배척하고 싫어하는 사회는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더 많은 정치적 '커밍아웃'이 필요합니다. 저는 더 정치적인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by sonofspace | 2009/10/23 15:59 | 트랙백 | 덧글(4)

반 MB를 반대한다

작년과 올해 초, 이명박 정부의 잇단 실정이 이어지면 반 MB라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MB 정권은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이며, 퇴행적인 정부이기 때문에 일단 모든 세력이 힘을 합해 MB의 타도에 힘쓰자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이다. 올해 초 미디어법 반대를 계기로 불거지기 시작한 반 MB 연대는 아마도 내년 지방선거에서 더욱 부각되고 선거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일단 한나라당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후보단일화를 통해 당선 가능성이 있는 야권 후보를 밀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언론에서,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현 정부를 싫어하는, 거의 혐오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반mb라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수긍한다. 반MB라는 구호는 어느 정도는 '대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는 내용이 없이 무조건적인 반 MB 연대, 반 MB 전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있어왔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조심스레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반 MB를 반대한다. 반 MB가 나빠서가 아니라 반 MB로는 안 된다. 반 MB로는 MB를 이길 수 없다. 오래도록 박근혜가 확고부동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손꼽히고, 숱한 아마추어적 실수에도 도로 회복하는 MB의 지지율은 반 MB라는 주장의 비실효성을 확증해주고 있다. 


민주/반민주, 독재/반독재의 잘못된 전선
 
문제는 반 MB라는 구호가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전선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MB를 반대해야 하는가? 반 MB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MB가 반민주, 독재 세력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고, 독재는 나쁜 것이다. MB는 지금 국민들을 억압하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독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MB를 타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부패라든지, 부자정권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더 붙어서 반 MB의 주장을 형성하지만 현재 주로 표출되고 있는 양상은 대략 이렇다. 

물론 '옳은'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고 독재는 나쁘다. 모든 국민이(한나라당도) 동의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확실히 이전의 두 정부에 비해 권위주의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더 많이, 그리고 더 과격하게 침해하고 있다. 금지 도서, 시민 단체 사찰, 인터넷 통제 같은 '독재 정권에서나 볼 법한' 퇴행적 행태도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일이다. 난 이 주장의 '정당성'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연 이 주장이 현재 이 시점에 '적합'하고 '효율적'인가? 또는 이 주장은 현재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반민주 독재 이명박 정권 몰아내고 민주주의 수호하자!"라는 주장은 유권자(혹은 국민)들을 설득해서 반 MB로 이끌 수 있을까?

지난 대선 기간 때부터 진행돼온 양상을 보건대, 단연코 대답은 'No'이다. 민주/반민주, 독재/반독재의 전선 나누기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이 이명박 정권의 '실체'(반민주와 독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명박을 대선에서 찍었으며 이명박의 그 정체를 폭로하고 나면 '당연히' 이명박을 반대할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해 있다. 보라, 국민들 뜻을 무시하고 소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이 정부를.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연행했다. 인터넷에 비판 글 썼다고 잡아갔다. 언론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으며, 대리 투표로 민주적 절차를 어겼다. 표적 수사로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내몰았다. 등등. 이런 반민주적인 행태를 폭로하면 국민들이 이명박을 반대하게 될까? 물론 잠시 그런 모습도 나타났지만 다시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국민들이 '속고' 있기 때문일까? (최근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인터넷상의 반대자들에서 가장 흔하게 나온 반응은 '국민들이 속고 있다'와 '이 죽어버릴 국개들'이었다. 세상 참 편하게 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명박은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이 다 드러났는데. 먼저 생각을 다시 해보자. 국민들은 과연 이명박이 반민주적이고 독재적 혹은 권위적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천만에. 우리 국민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이 어떤 내력의 정당인지 알고 있고, 이명박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다. 대선 때에도 이명박이 얼마나 무식하고, 권위적이며, 부패한 인물인지는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런 오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야권은 오랫동안 bbk를 걸고 넘어졌지만 사실 그건 패배로 가는 직행 코스였다. 대인배 국민들은 그런 비리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우리가 원하는 건 경제를 살리고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강한 대통령이었으니까.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도덕성을 바라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후배랑 이명박이 살인이나 강간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또 원더걸스랑 원조교제하지 않았다면-_-;) 문제없이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만큼 국민들이 생각하는 도덕성 허들은 높았다. 약간의 비리나 편법은 대략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찬가지 관점을 현재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독재가 나쁘고 민주주의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명박 정도의 반민주'는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을 독재라 부르면 거부감을 느끼는데(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독재에 대한 기억은 '고작' 이명박을 독재라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3선을 넘어 영구집권을 기도하거나, 한 도시를 공수부대로 쓸어버리는 일은 해야, 최소한 경찰서에 잡아가 탁 치고 억 하고 죽여야 독재정권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수 있다. 덕분에 한국민이 가지고 있는 반민주와 독재 허들은 꽤나 높다. 이명박 정권의 현재 모습은 그 허들을 결코 안 넘는다. 그 정도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독재'는 아니다. 뭐 어쨌거나 시장에 가서 오뎅 꼬치도 먹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대통령 각하니까.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은 이명박에게서 민주적인 정부를 만들어주길 바란 것이 아니다. 경제(내 호주머니)를 살려주길 바랐지. 오히려 약간은 권위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해도 괜찮다고도 생각했다(사람들은 '강력한' 정부를 바랐다. 또한 '불도저'는 절차를 무시한 무조건적인 강행 추진의 상징이지 않은가). 마치 경제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킨 박정희와 전두환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약간은 비리에 얼룩져 있고 권위적이지만, 타고난 뚝심으로 경제를 살려줄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가 전과 14범이건 말건. 민주/반민주, 독재/반독재의 전선은 시작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MB를 반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반대를 넘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뿌리부터 깊이 있는 고민과 반성을 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무엇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민주개혁세력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참여정부의 경제 실패가 이명박 당선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이 사실을 곱씹고 반성하지 않고서는 결코 보수세력을 이길 수 없다. IMF 극복, 국민소득 성장, 최대치를 갱신하는 재정수지 흑자 등등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경제적 공적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중산층 경제는 실제로 피폐해졌다.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꾸준히 올랐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그러면서 정규직 취업 경쟁은 격화되었고, 교사, 공무원은 '귀족' 직업이 됐다. 인력 구조조정으로 인해 창업한 자영업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각자 얻는 소득도 줄어들었다. 상대빈곤층만이 아니라 절대빈곤층까지 늘어났다. 2002년 9퍼센트였던 절대빈곤층 비율이 2006년에는 16퍼센트로 치솟았다. 반면 부동산과 주식 폭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의 꿈 같은 이야기가 신문지상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젠 너무 많이 말해 지겨우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경제 정책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화려한 지표 뒤에는 불안정의 늪에 빠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목격한 일이고 직접 경험한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궁핍해졌다. 적어도 나(우리 가족)는 그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점차 힘들어졌다! 결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작년 대선에 경제가 핵심 쟁점이 되고 결국 이명박이 당선된 것은 다수의 유권자들이 겪고 있던 궁핍과 불안, 갈수록 어려워져가는 살림살이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경제를 어렵게 만든 참여정부를 '심판'했다. 국민들이 개새끼라서, 속아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식의 사고는 책임 회피이고 비겁한 변명이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런 반성 없이, 국민들이 왜 자신들을 버렸고 심판했는지 알려 하지 않고 국민을 욕하고 20대를 욕하는 게 타당한 행위일까? 그런다고 국민들이 다시 돌아올까? 오류를 시정할 생각 없이 자폐아들처럼 앞으로 3년만 버티자고 위안을 삼고 있다. 3년 후에는 정권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민주개혁세력이 참여정부 평가를 할 때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참여민주주의, 소통,  지역주의 타파 이런 내용들이다. 자신들이 망친 중산층 경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경제다.

 
지금의 민주당, 친노, 폭넓게 범 민주개혁 세력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같은 진보세력들은 모두 싸그리 "경제를 망친 무능한 놈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부패한 독재정권의 후신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경제를 부흥시킨 박정희와 경제가 아주 안정적이고 풍요로웠던 전두환, 노태우(그리고 김영삼 초기까지도 괜찮았다)의 후신이기도 하다. 이승만부터 박정희를 거쳐 내려오는 보수세력의 계보는 독재정권을 이었다는 측면에서는 낙인이 될 수 있지만, 후진국 한국을 눈부시게 부흥시킨 전력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매력적인 장점이 된다( "어쨌든 문제는 있었지만 한국을 이렇게까지 발전시킨 건 다 박정희 덕분이잖아?") 보수세력의 '과거'는 약점만이 아니다. 보수세력이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은 알게 모르게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다. 왜 하필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선택했냐고? 그 사람들은 경제를 발전시켜온 사람들이며, 이명박은 그 발전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니까.        


물론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가 헛된 것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기대를 걸었고 지금도 걸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비난은 기분 전환은 될지언정 아무 의미가 없다. 어째서 그런 기대를 품고 있고, 어떻게 하면 그런 기대를 부술 수 있을지를 분석하는 것이 정말 해야 할 일이다. 보수=경제발전, 진보=사회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무능이라는 관념을 깨 부시고 진보도 경제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진보가 제시하는 경제발전만이 대기업과 대자본의 배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발전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역사의 진보로

만약 민주당의 기획이 성공해서 반독재 민주주의 수호의 기치로 반MB 연대가 공고히 이루어지고 드디어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정부의 모습은 어떤 것이 될까? 만약 그 정부의 모습이 소통과 토론을 중요시하고, 민주주의를 잘 지키는 아름다운 참여정부와 비슷하다면 나는 결단코 그 정부에 반대한다. 만약 그 정부가 참여정부가 했던 것처럼 경제 정책을 운용한다면 5년 후에 국민들은 더 큰 환멸과 함께 또 다시 보수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이다. 중산층은 더욱 피폐해지고, 부의 편중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인터넷에서 대통령 욕했다고 잡아가지는 않겠지만 일자리 보장하라고 데모하면 마찬가지로 전경들이 후드려 패서 잡아갈 것이다. 안 된다. 되돌아가는 건 사양이다. 그것 역시 역사의 퇴보이다.

 
그러나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반 MB의 구상은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명박이 지금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상당히 위협하고 있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을 위협받고 있었다. 민주주의,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민주주의보다 자기 목구멍과 호주머니 사정을 더 걱정하고 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 갈수록 쉬워지는 해고, 뭘 해도 뾰족한 수가 안 나는 상황인데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이 걱정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이다.  
    

이 걱정의 근원은 이명박이 아니다(물론 노무현도 아니다. 둘 다 일조하긴 했다). 이명박을 물리친다고 이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반 MB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MB를 몰아내고 뭘 어떻게 할 건데? 그 이후의 대안이 없는 한, 반 MB라는 주장은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이명박 정부 아래의 삶이 괴롭긴 하지만 딱히 참여정부 시절이 그리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렵긴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도로 참여정부'가 아니라 그 이상을 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대안은 "당신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담고 있어야 한다. 비워져가는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두둑이 채워줄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명박과 한나라당과는 다른 방식의 '경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그 새로운 경제가 더 '왼쪽'으로 간 경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는 명백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우파적 경제 정책을 채택했다. 그 기간 동안 삼성과 현대, 엘지 등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기업이 됐지만, 다수의 신용불량자와 고용 불안, 양극화를 배태했다. 우리는 80대 20, 또는 90대 10의 사회가 오는 것을 목격했으며 하층의 80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어지지?"라고 의아해하고 분노했다. 두 정부에 참여했던 민주개혁 세력이 사람들이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에 자신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적어도 자신들이 채택해온 경제 정책에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까지의 해악을 제거하는 '좌파적' 정책을 채택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때만 국민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소망대로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들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한, 새로운 경제상에 대한 고민 없이, 이전의 자신들에 대한 반성 없이, 여전히 예전의 경제관을 그대로 가진 채로 진행되는 반 MB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그런 반 MB로는 MB를 이길 수 없다. 또한 설령 이긴다 해도 그렇게 만들어진 미래는 결코 행복한 미래가 아니다. MB를 몰아내면 정말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까?  MB를 악의 축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의 흐름은 은연중에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을 MB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이런 시각은(이게 다 MB 때문이야!) 매우 우려스럽다. 게다가 우습게도 현실 정치에서 반 MB 주장의 가장 큰 이득은 박근혜가 보고 있다. 반 MB, 반 한나라당을 넘어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는 자본의 독재, 시장의 독재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해결하지 않는 한 모두가 행복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난 반 MB를 반대한다. 그것이 성찰 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민주개혁세력이 좀 더 성찰하길 바라며, 한나라당과 별다른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어정쩡한 포지션을 집어던지고 더 왼쪽으로 이동할 때 민주당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럴 때 진보진영과의 연대도 가능해질 것이다. 어쨌든 그건 그들의 사정이다. 촛불시위, 미디어법, 노무현 서거, 김대중 서거라는 좋은 기회가 오고, MB가 대형 뻘타를 여러 번 날렸음에도 민주당이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기야 좌파들도 그런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민노당이고 진보신당이고 사회의 중심 담론을 생성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글 쓰고 있는 나 같은 인간들도 그렇고. 그것은 우리(좌파)의 과제이다. 


나는 진보진영이 반 MB라는 프레임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을 하길 바란다. 민주/반민주라는 어이없는 전선에 갇히지 말고,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자. 우리가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MB와 한나라당 때문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시스템 때문이라고 바르게 지적하고 국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미쳐버린 시스템을 고칠 방안을, 공공성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온 세력은 언제나 '좌파'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계속 '진보'해왔다. 시대가 험난할수록 좌파의 역할은 더욱 요청된다. 지금도 바로 그런 시기이다.

by sonofspace | 2009/09/23 19:01 | 생각 | 트랙백(2) | 덧글(8)

민주당의 정운찬 까대기.

민주당의 정운찬 총리 지명자에 대한 공격은, 솔직히 말해 삐진 유치원생의 징징거림으로밖엔 안 보인다.



뭐 물론 인사 청문회는 중요한 자리고 잘 검증해야 하긴 하는데, 민주당은 애시당초 정운찬을 떨어뜨릴 것을 전제로 하고 청문회를 준비하는 것 같다. 민주당은 자신들을 '배신'한 정운찬을 '용서'할 수 없어서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 것 같다. 유치하다. 내가 잘은 몰라도 정치는 증오와 분노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민주당의 정운찬 공격은 본질적으로 삽질과 누워서 침뱉기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정운찬이 총리 자격이 없다며 공격하고 있지만, 그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세우려고 한 것도 민주당 계열이다. 집단치매에 걸리지 않고서야 대통령 후보로도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총리 자격이 없다며 공격하는 게 상식적인 행동일까? 민주당으로선 정운찬의 약점을 찾아내면 찾아낼수록 자신들이 과거에 얼마나 멍청하고 개념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된다.



성숙하고 정치적인 민주당의 태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정운찬 씨가 이명박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부디 평소의 소신대로 정책을 펼쳐서 서민들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달라. 이명박 정부는 이번 개각을 기화로 삼아 말만 중도 실용이 아닌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실용 정부가 되기를 희망한다." 정운찬이 만약 자신의 소신과 다르게 이제까지의 MB 정부와 다름없는 정책을 편다면 비판은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지금 민주당의 행동은 '조직'을 배반하고 상대 조직으로 간 조직원에 대한 복수 정도로 비친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반MB 세력으로서는 MB가 정치를 잘하는 게 좋을까? 못하는 게 좋을까?


MB와 한나라당 척결을 지상 과제로 삼는다면 못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대략 '좋은 나라 만들기'라면 잘하는 게 좋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난 MB정부의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이건 인간 누구나 가지는 병폐이긴 한데, 우리들은 보통 자신의 '예상'이 자신의 '바람'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예상이 맞으면 좋아하는 경향도 있고. MB 정부의 실패(국가 경제의 파탄)을 예상한다고 해서, 그것을 바라거나 기뻐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우리가 반 MB라는 구호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그런 병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정운찬 공격도 그런 한 경향이 아닐까?


정운찬은 확실히 이제까지 MB 정부가 기용한 인물들과는 차별되는 인사이고, 그의 정치적 성향은 이제까지의 MB 정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이전보다 진일보한 기용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가 얼마나 그 안에서 활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가 평소에 밝혀온 대로의 생각대로 활동한다면 MB 정부의 폭주에 어느 정도는 브레이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기대는 걸어볼 수 있다. 적어도 아직은 그를 욕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반 MB, 반 한나라당이라는 구호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by sonofspace | 2009/09/15 16:32 | 생각 | 트랙백 | 덧글(2)

[인생의 만화들] <총몽>은 자신의 업을 극복할 수 있을까?

키시로 유키토의 출세작 <총몽>은 '한 번은' 완결된 작품입니다. 들리는 이야기대로 라면, 작가가 <총몽>의 연재 후반부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급히 완결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완결후 10년여 후에 키시로 유키토는 오리지널 <총몽>의 후반부에서부터 스토리가 이어지는 <총몽 Last Order>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원래의 <총몽>의 엔딩은 흑역사가 되는 것이고, <총몽 LO>가 정식 스토리 라인으로 이어진다고 봐야 맞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저를 포함해 어떤 팬들도 <총몽>이 다시 연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10년여의 세월 탓인지 <총몽>과 <총몽 LO>는 분명 캐릭터와 스토리는 물론 세계관과 주제의식까지 같지만, 하나로 합치기엔 어딘지 껄끄러운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사정상 급히 완결을 낸 원래의 <총몽>만으로 이 만화는 명작의 반열에 들기에 충분하며, 특히 저는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 시기에 봐서인지는 몰라도 이 원래의 <총몽>이 제 인생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냥 <총몽>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녹슨 천사의 디스토피아

(이 '녹슨 천사'에 아직 반해 있다)


<총몽>의 시작은 매우 강렬합니다. 고철마을의 의사 이드가 쓰레기더미에서 갈리를 찾아내면서 만화는 시작합니다. 부서진 기계 몸에 머리만 남아 있는 갈리의 모습은 제목 그대로 '녹슨 천사'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 장면은 파괴, 더러움, 혼돈, 극도의 무질서와 부조리 속에 파묻힌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구도는 곧장 작품의 배경인 고철마을 전체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자렘에서 버리는 쓰레기로 연명하는 고철마을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를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상층'의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살아가는 세상, 도덕도 윤리도 없이 힘과 폭력이 지배하며,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허물어져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한 미래 세계가 <총몽>의 배경입니다. 전형적인 사이버펑크물이지요.

무질서의 더럽고 음울한 고철마을에서 유일한 질서는 자렘뿐입니다. 온갖 폭력과 파괴가 판치는 고철마을이지만 자렘은 절대적으로 군림하면서 문자 그대로 고철마을 위에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고철마을의 무질서는 자렘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된다고 할까요. 작품 초반 갈리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 유고의 죽음 역시 자렘의 질서에 도전한 결과입니다. 이 절대적인 상하 관계가 <총몽>의 주요한 축이며, 작품에 음울함을 더하는 중요한 입니다.

갈리는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에서 싸움을 시작합니다. 갈리에게 싸움은 과거와의 유일한 연결끈이죠. 갈리는 자신의 이름을 비롯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기갑술'이라는 싸움의 기술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갈리는 싸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의'와 '자아'를 찾아갑니다.

여기에 갈리가 인간의 뇌에 기계몸이 달린 사이보그라는 사실이 갈리의 싸움에 좀더 무게를 더합니다. 기계 몸을 가진 사이보그에게 '생명'이란 무슨 의미일까?  사실 이제 보면 진부한 물음이긴 하지만(그리고 SF 장르에서는 흔한 주제이지만) 소년만화라는 틀에서는 색다르고 나름 진지하게 다가옵니다. 싸움은 갈리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행위이며, (기계 몸이지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행위입니다. 갈리는 작품 내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면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지만 결코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 살아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인지, 왜 살아 있는지를 물으면서 갈리는 자신의 자아를 찾아, 자신의 자유를 찾아 싸웁니다.



다마스커스 칼, 혹은 아웃사이더


<총몽>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유 중 하나는 다마스커스 칼입니다. 갈리의 주무기인 다마스커스 칼은 일정량의 '불순물'이 섞인 철로 만들어졌으며 그래서 더욱 단단합니다.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강하다'라는 부분은 <총몽>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메시지이며, 과학적으로도 맞습니다. 다마스커스 강은 실제로 강도가 높았던 것으로 유명했던 고대의 철의 이름이며 여기에는 니켈이나 크롬 등의 자연적으로 첨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철을 제조할 때는 순수한 철(Fe)로만 만들지 않고 일정량의 다른 성분을 첨가합니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도 유전자의 순수성은 멸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동일한 유전자끼리의 결합은 치명적인 열성 형질을 발현시킬 확률을 높입니다. 과거에 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을 한 왕가들에서 치명적인 유전병이 나타나고 자질이 모자란 왕들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결과이죠. 생물학적으로는 단연 '잡종'이 바람직합니다(레바논이나 베네수엘라에서 미녀가 많은 것도 이들 국가들에는 혼혈이 많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고요).       


아무튼 이 다마스커스 칼은 갈리의 무기이자 상징입니다. 만화 중간에 누군가가 말하듯 갈리는 천성적인 아웃사이더이죠. 주변과 완전히 화합하지 못하는 체제의 불순분자이며 나쁘게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갈리의 행동은 항상 주어진 세계의 질서와 예측을 벗어납니다. 노바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LO에서 카멜라 생귀스가 갈리에게 '파타 모르가나'를 맡길 때 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개체는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역시 큰 변혁을 가져오는 것은 체제에 불순응하는 자들입니다. 


작품은 다르지만 <세븐시드>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죠. 너무 뛰어난 인재들은 적응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프로그램 입안자들은 부적응자들만을 모아놓은 여름B팀을 보험으로 남겨둡니다. 맥락은 여기서도 비슷합니다. 세상은 학교 시험이 아니라서 정답이 없습니다. 또 때로는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행동보다 예측불허의 행동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리의 강함은 그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 현실과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불순함'에 있습니다. 마치 결코 부러지지 않는 한 자루의 다마스커스 칼처럼.


업을 넘어서, 자유를 향한 투쟁

<총몽>에서 핵심적인 주제 하나는 '업'(혹은 '카르마')입니다. 불교 용어인 업은 기본적으로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입니다. 간단하게는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결과를 얻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를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좀더 들어가자면 '업'은 강력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현재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과거의 업의 결과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 과거는 또 그 과거의 결과.... 이런 연쇄는 무한히 이어집니다.  우주의 모든 운동은 예측가능하며, 인간의 운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네가 지금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너의 뇌 세포가 전기적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야....' 우리가 자유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도 실상은 뇌의 전기화학 반응의 결과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반응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뇌를 모두 분석해서 행동 양식을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서 유래하는지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입니다.

(디스티 노바는 정말 매드사이언티스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덕도 이성도 모두 날려버리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광인. 그러나 그도 자유를 향한 답을 찾아 헤메는 방랑자다.)


최악의 매드사이언티스인 디스티 노바의 발언은 그렇기 때문에 전율스럽습니다. "과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업'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업'을 정복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어!" 노바 교수는 끔찍한 악역이지만 여느 등장인물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내뿜습니다. 그건 그가 항상 인간의 한계를, 주어진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난 그런 이세상 전부를 증오해! 열역학 제2법칙을 증오해!" 처음 읽을 당시에는 열역학 제2법칙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압도당했지만 이제는 노바 교수의 증오와 절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비가역성을 절대적 법칙으로 천명합니다. 뜨거운 물은 식지만 차가운 물은 덥혀지지 않듯, 우주의 모든 것은 차츰 식어져갈 뿐입니다. 어떤 그 무엇도 이 흐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결정된 우주를 노바 교수가 증오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과거의 업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진행될 뿐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정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이 <총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작중에서 절대적인 지배층으로 나오는 자렘은 사실 모든 욕망과 충동이 제거된 무미건조한 사회입니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진행되며 틀에 맞춘 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완벽히 합리적인 사회에는 자유란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무질서와 폭력으로 가득 찬 고철마을이 훨씬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작중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모두 정해진 질서에 도전하고 주어진 법칙과 싸웁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까지 자렘으로 가려 했던 유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분노로 자렘의 지배를 부수려했던 덴, '천의 얼굴을 가진 광기'로 극한을 넘어 자유를 추구했던 디스티 노바, 영원한 아웃사이더 갈리까지 입장도 성격도 다른 이들이지만 모두 자신들의 속박과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강한 의지의 주인공들입니다. 저는 이런 강렬한 캐릭터들이 LO에는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덴의 이 장면은 그야말로 간지폭퐁!! 자렘을 떨어뜨리려는 그의 시도는 무모했고, 허무하게도 아무 소용 없었지만 그의 의지는 감명적이었다)


작가 키시로 유키토는 뚜렷히 표현은 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게 싸워나가는 과정이 자유를 향하는 길이라고, '생명'의 활동과 의지가 결정된 우주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자유로운 우주를 만드는 방법일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갈리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업의 극복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by sonofspace | 2009/09/07 22:11 | 즐거운 인생 | 트랙백 | 덧글(2)

화해와 용서에 대하여

 


상반된 인식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북한 독재정권의 협력자라고 비난한다. 한쪽에서 그는 군사 독재와 온몸으로 맞서 싸우며 고난의 세월을 버텨온 인동초, 보복 없이 화합의 정치를 연 큰 사람, 인권과 정의의 대변자,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 평화의 수호자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를 남한 빨갱이의 수령이자 호남의 수괴로 취급하며, 대한민국의 정당성에 대한 배반자로, 북한에 한없이 퍼주어서 체제를 존속시켰고 허울뿐인 평화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반역자'를 국장으로 예우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임에 틀림없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언젠가 어머니랑 TV를 보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에 대해 말이 나온 적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발언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돈으로 받은 거잖아. 북한에 퍼주고 해서." 난 어머니를 존경하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북한이랑 평화로운 분위기가 됐었고, 평화는 좋은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천천히 통일로 가는 거죠." "그게 무슨 평화니. 그때 지원받은 돈으로 북한 애들이 핵도 개발하고 그런 거 아니냐." 그건 지금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 탓이 크다고 말했지만 별로 받아들이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은 아니다. 이웃을 생각할 줄 아시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나의 기본적인 도덕 관념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 97년 대선 당시에는 김대중을 찍었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노벨평화상은 돈으로 받은 것이고 북한에 퍼준 돈으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했다고 말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성과를 깡그리 무시했을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이 돌덩이로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실까? 무엇이 그런 생각을 품게 했을까?



누가 국민을 분열시켰는가

금메달을 따든, 골프 대회에서 우승을 하든, 우주를 다녀오든, 유엔 사무총장이 되든, 한국인이 했다면 모든 언론은 흥분해서 한국인의 자랑이라며, 한국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다며, 국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고 기쁨을 안겨주었다며 온갖 찬양과 민족주의적 선동을 쏟아낸다(심지어 한 축구선수의 재계약에도 섬세한 신경을 쓴다). 한국인의 피가 조금만 섞여 있더라도 그 사람이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낸다면 한국인의 뛰어남에 대한 찬양은 변함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으로 떠받들고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이라는 굉장한 업적은 너무도 간단하게 '돈으로 받은 것'이라며 한없이 격하되고 있다. 대체 어째서? 어느 누가 또 노벨상을 받았던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위상이 높은 이 업적에는 왜 언론의 떠받듬이 없는 걸까? 스포츠 이벤트의 결과에는 거의 무조건적인 찬양과 열광을 표출해왔던 신문들이 왜 노벨상 수상의 경우에는 '공평과 정의의 시선'을 되찾은 듯 냉정하게 온갖 흠집을 찾고 로비의혹을 들먹인 걸까?  얼마든지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한국의 위상을 크게 향상시킨 위인'으로 보도해서 여느 때처럼 국민들의 자부심을 만족시키고 온 국민의 화합을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반대로 수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논리와 주장을 쏟아냈으며 그 결과 '국민들을 분열시켰다'. 지금까지도 이 분열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전 정부의 모든 성과를 이렇게 평가절하했다. 남북의 교류와 협력은 '북한 퍼주기'와 '북한에 끌려다니기'로 윤색했고, 경제는 IMF 조기 탈출과 지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렀다. 북한을 함께 통일로 나아가야 할 동반자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과 재벌 중심의 기득권층들이 만들어낸 논리가 10년 사이에 대규모로 퍼졌다. 그 결과는 역시 '국민의 분열'이었다. 평소에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 논리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아무래도 반공교육을 직접 받은 중장년층에게 환영받았지만 이데올로기란 시대를 뛰어넘는다. 윗세대들의 품고 있는 적대감은 아랫세대로도 이어지며, 그래서 젊은 층들 사이에서도 평화와 화해, 협력은 필요하지만 '강경'한 정책 역시 필요하다는 입장은 상당히 많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들 식대로의 구분대로라면 '보수'와 '진보(개혁)'의 갈등과 분열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심화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도, 훨씬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포장될 수 있었다. '북한 퍼주기'가 아니라 '인도적 지원과 통일을 향한 한 걸음'으로, '북한에 끌려다니기'가 아니라 '상호협력의 진일보한 남북 관계'라고 정의할 수도 있었다. 만약에 그 신문들이 그렇게 보도했다면, 현재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훨씬 긍정적으로 변했을 것이고 이번 국장을 둘러싼 대립도 없었을 것이다. 필시 국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이명박이 북한 인사들과 만난다고 빨갱이, 배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확대 재생산했으며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며 더욱 강경해졌다. 그 결과가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노무현,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 나타난 극우 세력의 추악스러운 난동이다. 물론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는 이들의 자유이다.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사회니까. 나는 다만 이들의 보도가 국민들의 분열과 대립을 획책했다는 점을, 이들이 사람들의 증오와 분노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말'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한 번 사람들에게서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후에 '진실'이 밝혀져도 그대로 남는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제는 조선일보조차 '민주화 항쟁'이라고 인정하지만 아직도 당시 언론에 영향을 받은 일부 사람들은 '내란'이었다고, '북괴의 사주'였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이 묘역에 참배하는 것에도 알레르기성 경기를 일으킨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내란 수괴, 빨갱이라는 당시의 보수 언론이 형성한 이미지는 지금까지 계속 존속하고 있다. 더 이상은 어떤 주류 언론도 그런 주장을 (노골적으로는) 하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악덕이 있다. 우리는 좀처럼 눈에 씌어진 색안경을 벗지 못한다. 그리고 이 색안경은 갈수록 점점 덧씌어져만 가고 있다.


누가 이런 색안경을 씌었으며,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에 반대하고, 북한 조문단을 반대하고, 남북 협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체 누가 만들어냈던가? 한국 사회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극우 보수 단체들에게 이념과 논리를 제공해준 것은 이들 보수 언론이었다. 이르게는 해방 시기의 좌익 세력 탄압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색깔 시비와 최근 들어서는 햇볕정책 등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화해'와 '화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증오와 분노만을 자극해왔다. 이제, 이 증오와 분노는 너무 멀리까지 진행되어서 민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멋모르는 꼬꼬마들까지 지역 감정에 놀아나고 있다. 


화합, 화해, 용서. 모두 좋은 말이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 '사과'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과도 하지 않는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일 관계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어떤 사람들(주로 한나라당 관련)은 한일 관계가 이제는 과거를 넘어 화합의 미래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좋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앞에 먼저 '사과'가 있어야 하며 그 중요한 절차가 없기에 한일 관계는 여전히 화합의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과 없는 용서는 존재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을 기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신문들이 내세운 화합과 화해의 메시지가 불편한 것은 과거의 행적과 잘못에 대한 어떤 성찰과 반성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 '화해의 감동'은 감성을 뭉클하게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고인의 높은 뜻에도 불구하고, 한낱 한순간의 이벤트이자 립서비스에 불과할 것 같다. 보수 세력과 언론의 진정한 사과와 태도 변화가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친일 경력에 대해서도, 독재 정권 협력의 경력에 대해서도, 김대중에 대해서도, 노무현에 대해서도 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 대해서도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의 잘못된 보도를 사과함으로써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진정한 화합으로 나갈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과하지 않았기에 '전라도 빨갱이'라는 기막힌 어구가 아직도 세상을 횡행하고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과 햇볕정책에 대한 적대적인 여론이 견고하게 남아 있다. 이런 증오와 분노의 고리를 일으킨 이 장본인들이 아무런 사과도 없이, 이제는 화해와 용서의 시기라며 과거를 덮자고 말하는 모습에서 '파렴치'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 그렇게 억지로 어설픈 화해로 가는 것이 정말 '고인이 원하는 길'일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지금껏 너무도 쉽게 '화합'과 '화해'를 말해왔다. 그러나 반면에 '반성'과 '사과'는 너무도 적었다. 친일 세력에 대한 철저한 책임 추궁과 심판 없이, 독재 세력에 대한 철저한 책임 추궁과 심판 없이, (나라가 어려운데) '국민이 화합해야 한다'며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건 '화합'이 아니라 '야합'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어설픈 봉합 때문에 아직까지도 상처가 심하게 덧나고 있다. 진정한 화합의 길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건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행동의 전면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건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야 하고 때로는 도려내기까지 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진정한 치유는 불가능하다. 그저 상처를 보이지 않게 반창고로 가려두고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을 우리는 '치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화합을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아파야 하고,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허울뿐인 값싼 화합을 나는 경계하며,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떠올려본다. 



ps. 그러나 상대를 정치적, 합리적으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무조건적인 분노를 부추기는 건 비단 보수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증오를 부추기는 건 소위 '진보'에도 만연한 문제다. 도덕과 감정이 아닌 이성과 이념에 근거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by sonofspace | 2009/08/27 21:11 | 생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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