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삶

일자리 확대의 이면



'일자리를 늘리겠습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선거철 후보들의 공약에는 이런 내용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일자리 만들기는 여러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하는 당연한 말이 됐다. '좋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같은 구호는 거의 진실처럼 받아들여진다. 만연한 실업과 불안정노동의 시대에, 이 구호는 분명 일정한 진실을 담고 있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정치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일자리 확대는 정치인의 의지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일까?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이 아닌 한,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선 산업을 확대하고 따라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이 좀 더 선호하는 공공 서비스의 확대라는 방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새로운 산업의 성장, 새로운 시장의 개척 없이는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 일자리 확대의 요구는 사실 산업을 발전시키라는 요구와 다름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점은 이것이다. 시장의 확대는 긍정적인가? 그래서 시장을 확대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시장의 확대는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이윤 추구의 법칙은 자본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만든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장이 필요하다. 확대, 그리고 또 확대.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 과정은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과정이 멈추는 것은 공황이라는 무시무시한 재앙 때뿐이다.


시장의 끝없는 확대


우리는 역사에서 그 과정을 봐왔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정복은 그 과정의 단적인 예이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전통적인 경제 시스템을 파괴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식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보 경쟁은 세계대전을 촉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장의 외적 확대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WTO, FTA를 통한 무역 규제의 철폐는 시장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이 과정이 쌍방향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잘 알고 있듯이, 일방적인 시장의 확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한미 FTA로 한국 자동차 회사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커질지 모르지만 농업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줄어들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이는 ‘시장의 통합’이지 새로운 시장의 창조는 아니다. 시장이 커진 만큼 경쟁자도 늘어난다. 능력 있는 자는 넓어진 시장을 이용할 테지만 퇴출당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 국가의 경제 성장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 효과 역시 이중적이다. 소비 시장이 늘어나는 만큼 생산자도 늘어난다.



지구상에 더 이상 새롭게 개척할 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외계 행성이라도 발견하지 않는다면, 시장의 물리적 확대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면 시장의 확대도 멈출 것인가? 그리고 더 이상의 발전도,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새로운 시장의 창조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예컨대 30년 전에 노래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지금 사람들의 노래 생활은 노래방에 의존하고 있다. 20년 전 휴대폰이 없었으니 휴대폰 시장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휴대폰이 만들어지고 보급되면서 지금은 가전회사의 핵심 시장이 되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남성 화장품을 만들어 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성들도 자연스레 화장하는 시대다.



이렇듯 새로운 기술의 출현과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혁신과 창조가 없이 자본주의는 존속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업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전에는 없던 것, 새로운 상품, 새로운 오락, 새로운 서비스가 정말 눈이 돌아갈 만큼 현란하게 계속 출현한다.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선사한다.




삶의 시장화

그러나 자본주의의 창조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휘되지 않는다. 먼저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도 창조해낸다. 필요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필요가 나타난다. 각종의 마케팅 기법이 이를 조장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많아질수록 자본주의는 발전한다. 더 많은 옷, 더 많은 시계, 더 많은 차, 더 많은 가전제품… 상품은 갈수록 세분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갖추게 한다. 또 제품의 수명이 짧아지고 더 자주 사게 된다. 시장은 그런 식으로도 확대된다. 그러나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가 올바른가 하는 도덕적 물음은 차치하고서라도, 환경운동가들이 경고하듯 그것은 지구 자원의 소모를 가져온다.



사회문화적 변화는 또 어떤가? 남성의 화장품 같은 건 사소한 예일 뿐이다. 이전에 사람들이 시장과 관계없이 하던 일들이 시장의 영역에 들어간다. 내가 어릴 적에 친구들끼리 노는 데는 별다른 돈이 들지 않았다. 다방구, 짬뽕, 와리가리, 얼음땡… 이런 다채로운 놀이들은 아주 간단한 기구와 친구들만 있으면 즐겁게 놀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PC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논다. 아이들이 시장의 고객이 된 것이다.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가정의 일도 많은 부분 시장화됐다. 아기 기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식의 비율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빨래방도 늘어나고, 집안 청소도 회사에 맡긴다. 그렇게 보육 산업, 외식 산업, 빨래 산업, 청소 산업은 성장했고 관련된 일자리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삶을 시장에 맡기게 되는 변화가 바람직한 걸까?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시장에 의존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고 더 자주 살수록 자본주의는 발전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삶의 시장화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자본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삶, 사회, 시장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자, 질병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의 답은 당연히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이들이 건강하게 살다 죽는다면, 의료 산업은 심각하게 타격을 받을 것이다. 또 말해보자. 범죄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범죄가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말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그러나 범죄가 없다면, 모든 방범회사들은 망할 것이고, 대다수의 경찰도 필요 없어져 해고될 것이다. 사회는 평화로울지라도 그들의 가정은 파탄날 것이다.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료산업이 이익을 위해 사람들에게 병을 일으킨다든지, 방범회사가 범죄를 조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경찰력은 더욱 필요해지고, 평균 수명의 증가와 현대의 생활방식으로 새로운 의료적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물론 ‘~~증후군’ 같은 사소한 질병을 강조하고, 사회적으로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겠지만) 다만 ‘산업적으로’ 좋은 것과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 전혀 상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전쟁 산업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세계가 평화로울수록 전쟁 산업(록히드 마틴, 보잉, 더글라스 등)은 망해갈 것이다.



이런 경우는 더 있다. 아마 혁신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의 발전은 환경과 에너지 절약에는 좋지만 자동차 산업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수소에너지 또는 핵융합 에너지의 개발은 정유회사와 산유국에는 악몽이 될 것이다. 생수와 정수기 산업이 발전하는 것보다 상수도가 신선한 물을 공급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학력주의 사회가 바뀐다면, 학생들은 좀 더 멋진 학창시절을 보내겠지만 학원들은 좀 더 우울해질 것이다. 외모지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성형업계와 미용업계는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등등. 요약하면 이렇다. 여러 산업이 발전한 사회가, 그래서 그런 각 산업에서 많은 일자리가 생기는 사회가 반드시 좋은 사회는 아니다.

좀 더 내밀한 삶의 영역을 이야기해보자. 다소 보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이는 집에서 부모의 무릎 아래 자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훌륭한 어린이집과 보모도 부모만큼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맞벌이의 증가를 이해는 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가정의 삶에 좋은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인디언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립이든 공립이든 현대의 보육 시스템이 아이들에게 그만한 상호작용을 선사할 수 있을까? 전반적인 집안일도 시장에 떠맡기는 것보다 가족이 함께 이럭저럭 처리해나갈 때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놀이는 또 어떨까? 화려하고 비싼 장난감이나 게임기, pc방이나 키즈카페 같은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공간이 없어도, 즐겁게 놀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창조력은 발휘되는 게 아닐까? 모모의 친구들이 원형극장 터에 모여들어 놀이를 만들어내 놀았듯 말이다.


시장은 편하다. 돈만 내면 모든 걸 해결해준다. 부모가 앓아누웠다고 해서 힘들게 직접 간병할 필요가 없다. 전문적인 간병인이 대신 더 잘 돌봐줄 것이다. 장례 역시 요즘은 전문업체에서 알아서 다 대행해준다. 장례 의식을 함께 준비하고 거행하던 전통적인 사회적 공동체는 사라졌다. 내 돌잔치 때 어머니는 직접 집에서 음식을 하고 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치렀다. 지금은 식당에서 쉽게 해결한다. 명절 때 예전에는 친척들이 모여 함께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마련했다. 나도 옆에 끼어 거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제사상을 통째로 주문할 수 있다. 친척들은 잠깐 모여 차례를 지내고 헤어질 뿐이다. 심지어 제사 자체를 대행해주기도 한다. 돈을 주면 가족도 돼주고 애인도 돼줄 판이다.



이것이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하고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앙상해지는 게 아닐까? 불편하고 비효율적일지라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때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까? 시장의 영역이 넓어지고 거기에 의존하게 될수록 우리는 삶을, 가족적․사회적․정치적 삶을 시장에서의 거래로 대체하게 된다.

일자리가 없어도 되는 사회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시장에 의존하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는 생명줄과도 같다. 일자리 확대를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로 두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시장을 확대시켜야 하는데, 나로서는 모든 시장의 확대가 긍정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시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시장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곳이다.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필요로 하는 것이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 시장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사회보다, 필요한 것이 적은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금욕 내지 무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보육원이나 보모를 많이 구할 수 있는 것도 좋겠지만, 부모가 직접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자가용을 많이 사고파는 사회가 아니라 자가용이 별 필요 없는 환경이 더 낫지 않나? 결혼정보업체가 여러 남녀를 연결시켜주지만, 그런데 의존하지 않아도 자기 짝을 구할 수 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결혼식에서 주례도 고용하고 하객도 고용한다고 한다. 그보다 주례를 부탁할 선생님이 있고, 찾아올 친구들이 많은 게 더 행복한 삶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일자리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해주는 역할이다. 대신 운전을 하고, 대신 가구를 만들고, 대신 청소를 해준다. 그런데 그렇게 각자가 각자의 일을 대신 해주는 건 좋은 일일까? 효율성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대신해준다면 의미가 많이 달라지는 일들이 있다. 스스로 처리했을 때 ‘인간적인’ 면에서 좋은 일들이 있다. 청소부에게 돈을 주고 집 앞 청소를 시키는 것과 직접 빗자루로 집 앞을 쓰는 것은 분명 그 사람에게 주는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게―즉,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일을 대신 맡기는 게―마냥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나는 시장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장의 증가와 발전을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폴라니 식으로 이야기하면 시장은 사회적 도구이며, 도구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도구가 모든 곳에서 긴요하고 필요한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듯 정말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살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삶에서 맺는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사랑, 우정, 추억, 신뢰, 지혜, 관용, 사려, 창조성… 그리고 그 밖에 많은 것들도. 시장에의 과도한 의존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얻고 쌓아나갈 기회를 박탈하지 않을까 나는 우려스럽다.



결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시장이 역할을 확대해나가면서 인간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다고. 옳은 말이다.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옷을 짓고, 스스로 자기 집을 만들던 과거의 자급자족 사회가 결코 천국은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자연의 제약에는 심각하게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는 데 삶의 전부를 바쳐야 했다. 인류는 사회적 분업을 실시하고 자본주의가 그 과정에 가속도를 붙이면서 그런 과정을 과거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끝이 보이지가 않는다. 시장은 끝없이 확대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는 돈을 주고 해야 하리라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들을 이제는 돈을 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삶이 다양해지고 풍요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시장은 놀랍도록 다양한 상품을 내놓으니까. 헤어스타일을, 레저를, 문화를 시장에 맡기면서 각각이 얼마큼 다양해졌나? 이제는 각자의 세세한 기호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돈을 벌고 상품을 소비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불구로 되어가는 건 아닐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모두 시장에 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돈만 있으면 된다. 진행되는 사회적 분업은 삶의 모든 것을 시장으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오래전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 인간을 몇 가지 단순한 일에만 익숙해지게 해서 “둔해지고 무지하게” 만들고 “정신은 마비상태에 빠져 어떠한 이성적인 대화를 즐기거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그럽고 부드럽고 고상한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없게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건 고작 일터에서의 분업일 뿐이었다. 삶의 영역 자체가 시장화되면서 우리의 인간성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왔고,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일들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이란 얼마큼 다양하고 많은 상품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얼마큼 깊고 지실되게 삶을 경험하고 즐기느냐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의심하며,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고민한다.


2012년 전망

2012년이 세계 멸망의 해는 되지 않겠지만, MB정권 종말의 해는 될 것이다. 통합민주당의 후보가 되든, 한나라당(이젠 새누리당)의 후보가 되든,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되든, 그(혹은 그녀)는 이명박과는 확연한 거리두기를 할 것이며, 이명박정권의 유산을 부정할 것이다. 2007년 이명박이 당선됐을 때 나는 다음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확연한 진보개혁 코드를 내세우며 당선된 노무현은 지지자들을 실망시키는 정치적 패착을 거듭하며,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다. 민주당 계열은 완전히 파산했다. 경제는 외형적으로 성장했으되 실제 민생은 엉망이었고, 그들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던 ‘도덕성’도 잇단 비리로 얼룩이 졌다. 실력은 보여준 게 없었고, 내세울 인물도 없었다. 국민들에게 미래를 위한 약속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상대쪽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도약시키겠다며, 747이라는 약속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이명박을 뽑았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 MB는 국민적인 조롱거리가 되었고,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으며 당명까지 바꿨다. 김대중 같은 카리스마적 리더도 없이, 사회개혁에 대한 비전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쪼그라들어 차마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지지에만 의존하던 민주당 계열은 민주통합당으로 거듭나 총선 승리를 바라보고 있다. 기호 2번 공천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2008년에는 민주당은 미래가 안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넘어서며, 한국 정치계의 역동성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아직까지 대선후보 지지율 1위는 박근혜지만, 2012년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 흥행을 일으키고 한 인물을 탄생시킨다면 정권 교체도 가능해 보인다.

 

 

단순히 세력 구도만이 변한 것이 아니다. 시대정신이 변했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 하던 노골적인 목소리는 간데없고, ‘정의’, ‘복지’, ‘공정’, '공평‘ 같은 가치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명박의 범법 행위에 눈감았던 국민들은 권력자들의 ’꼼수‘에 분노하고 있다. 정치에 냉소적이던 청장년층들은 참여해서 바꾸자라고 선동하는 열성적인 선거참여자로 바뀌었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은 가라앉고 좀 더 평등한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명박에게서 배운 것

 

 

지난 5년간 이명박은 사람들의 반면교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이명박은 한국 현대사의 영광과 오점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사원으로 시작해 한국 최고 기업의 CEO까지 올라간 성공 스토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지난 역사를 연상케 한다. 그의 성공은 곧 한국의 성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의롭고 아름답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에서 비롯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절차와 합의를 무시하는 폭압적․독재적 리더십,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불평등이 그 이면에 있었다. 이명박 개인의 성공도 마찬가지였다. 전과 14범이라는 희롱이 보여주듯, 그는 탈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이명박 개인의 근면과 추진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산업화 과정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보다는 생존이, 정의보다는 효율이 우선시되던 시대를 한국은. 그리고 이명박은 살아왔고 거기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도 짙었으며, 무엇보다 그런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신화란 언제나 감미롭다. 현실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 커다란 위기와 좌절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신화 속으로 빠져든다. 젊은 시절 잘나갔던 노인이 과거를 그립게 회상하듯이. 2007년 한국 국민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한국의 서민들을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보수언론의 선동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말부터 양극화는 서서히 진행돼왔고 그 당시에 가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위기를 맞아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제가 부흥하길 바라며 이명박을 택했다. 이명박의 부도덕함을 모르고, 속아서가 아니다. 그런 것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비록 부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1960~1970년대 폐허에서 한국경제가 성장했듯이 다시 경제가 성장하길 바라며, 그리고 그로써 자신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길 바라며, 그를 택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 ‘반동’이었다. 그동안 이루어져왔던 민주적 성취를 뒤로 돌리더라도 (적어도 경제성장이라는 의미에서) 좋았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반동의 실패를 처절하게 맛보고 있다. 과거는 재현되지 않았다. 애당초 재현될 수도 없었다. 시장과 자본에 대한 어설픈 통제 시도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바뀐 이 시대에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이미 일국적 차원의 통제를 넘어선 글러벌 시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지나칠 정도의 친미 중심 외교와 부정부패에 대한 무감각도 존경받는 선진국가를 꿈꾸는 지금 시대의 감수성과는 맞지 않았다. 이명박이 과거에 필사적으로 기어오를 수 있었던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진 지 오래였다.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는 일은 이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명박정권에 대한 비판은 주로 도덕성에 근거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정권이 비판받는 것은 도덕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MB가 약속한 대로 7퍼센트의 성장과 국민소득 4만 달러가 이루어지고 국민경제가 건강해졌다면, 정권의 몇 가지 추문과 비리는 ‘참아줄 만한’ 것이었을 테다. 국민들이 MB에 바란 것은 “도덕이고,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일단 우리부터 좀 잘살게 해주시오”라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경제가 성장했다면,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정말 국민 다수가 ‘부자’가 됐다면, 지금 정권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재벌 중심의 경제 성장은 더욱 심해지고, 중․하위 계층의 경제 상황은 바닥을 뚫고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명박에 의탁했던 경제적 욕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갑자기 양심을 깨달은 듯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욕하는 이명박의 허물이 사실 우리 지난 역사가 축적해온 허물이었으며, 어디에라도 존재하는 그림자라는 것은 인식하지 않는 한 진정한 극복은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크게나 작게나 편법과 반칙을 저질러왔고, 학연과 지연 등 각종 ‘빽’에 매달렸으며, 상명하복식의 권위주의는 전 사회에 만연해 있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 성공해왔다.

 

 

이명박정권은 우리가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과거의 방식은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추악한 폐단만을 가져왔다. 언론 통제, 자유에 대한 억압, 권위라곤 없는 권위주의, 우리가 5년간 신물나게 경험해온 것들이다. 촛불시위 당시 ‘이명박 요정설’이 나온 적이 있다. 이명박 덕분에 우리가 민주주의와 선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로 나는 이명박은 우리에게, 과거 한국을 경제적으로 성장시킨 개발주의 패러다임이 이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와 함께했던 부정적 유산들도 이제는 모두 청산되어야 할 ‘낡은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

 

 

균열이 생긴 신자유주의, 그리고 더

 

 

‘낡은 것’으로 판명이 난 것은 이명박식의 개발주의 패러다임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의 경제 패러다임이 되다시피 한 신자유주의 경제 역시 치명적이라 할 만한 타격을 입었다. 전세계의 좌파 활동가들이 십수 년째 경고해오던 경제 위기가 ‘드디어’ 현실이 된 것이다. 서브프라임 붕괴로 시작한 이 위기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남유럽 국가의 재정 위기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오큐파이 운동이라는 국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정말 냉정하게 봤을 때 노무현정부의 정책 노선과 이명박정부의 정책 노선은 둘 다 신자유주의라는 큰 맥락에서는 차이가 없다. 속도와 스타일,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했다. 노무현정부가 여러모로 균형발전을 도모하려 한 것은 사실이며, 종부세 같은 상징적인 조치를 통해 부자에 적대적이라는 인상이 보수언론에 의해 강하게 형성됐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이긴 노무현정권도 마찬가지였으며, 부자감세는 그때도 있었다. 두 정부 모두 부자를 위한 정부였다.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똑같다는 해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그 두 대통령만의 문제도 아니다. 부시도, 오바마도, 고이즈미도, 아베도, 사르코지도, 블레어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따랐다는 면에서는 같았다. 신자유주의는 그만큼 전세계적인 경제 기조였다. 감세, 규제 완화, 국가간 장벽 철폐, 자본활동의 자유 보장 등은 정말로 ‘국제적 표준Global Standard’이었다. 좌파를 비롯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시대에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노무현은 진심으로 한미FTA를 비롯한 여러 정책들이 국가에 필요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정권 중반쯤 이 신자유주의 자체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신자유주의가 대세’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똑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도 이제는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노무현정부 시절 신자유주의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상실하고 있다. 때문에 노무현정부의 경제 정책은 반대와 불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흐름을 따라서 수월하게 진행돼왔지만 이명박정부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이명박정부 특유의 유치하고 추잡한 행태가 관여하기도 했다.) 투자유치, 선진금융, 경영효율화 등의 단어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달콤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좌파 활동가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월스트리트와 자본가들이 경제 위기의 주범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책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삶을 구속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본(가)에 대한 분노가 팽배하고 있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제는 새누리당)조차도 정강에 경제민주화를 집어넣을 것을 고민하고 있다니 시대의 변화가 예사롭지가 않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된다 해도 이런 흐름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 지향해야 할 경제 체제는 무엇일까? 복지국가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식 복지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는 성장 둔화와 실업 증가를 극복하려는 자본의 시도였다. 물론 장하준이 주장하듯이,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경제성장률이 오히려 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문제해결에 ‘실패’한 것이지 신자유주의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물론 선진국과 ·1% 부자들의 부는 증가했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자본주의국가와 부자들에게 이윤을 집중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은 그래서 나왔다.)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신자유주의가 폐기되고(이 역시 쉬워 보이지 않지만), 예전의 복지국가나 케인즈주의 국가로 복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도 겪고 있다.(여기에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기까지 있다)

 

 

성급한 좌파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의 한계가 도달했다고 보는 것은 섣부른 일이겠지만, 현 시점의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세계 경제의 수뇌들이 모인 다보스 포럼에서도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어떤 변혁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 전세계가 고민하고 있다.

 

 

 

계급을 깨닫다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러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2011년 초반 반값 등록금 시위의 열풍은 놀라웠다. 나 역시 2000년대 초중반에 학기 초마다 등록금 투쟁에 관여했지만, 사회적 반향은 미비했다. 무엇보다 학생들 스스로도 등록금 인하의 필요성은 동감하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반응은 ‘투쟁할 시간에 공부하고 과외하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등록금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였다. 명문대로 일컬어지는 대학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졸업장)에 대한 수긍할 만한 대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컸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살인적인 등록금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세가 됐다. 수만의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와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는 등록금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고, 대학 졸업에 대한 보상 역시 현저히 감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등록금 문제에서 가시적인 성과는 없지만, 등록금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등록금만이 아니다. 여러 부분에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취업난젊은이들은 생활고에 자살을 하고, 적령기에 이른 남녀는 결혼과 출산을 피한다. 노년이 돼서도 쉬기는커녕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자기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회에 책임이 있다고 인지하며, 사회에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개인의 삶에 정치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좌파 운동가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주장해왔지만 먹히지 않던 것) 스스로 깨달아나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사람들이 서서히 ‘계급’을 깨닫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에는 가난했어도,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이 유행했다. 천박할 정도로 노골적인 표현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거기에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거짓된 것일지라도) 있는 표현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지도 않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질 않는다.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길은 로또뿐이다. 계층이 고착화돼 계급이 되어가고 있다.

 

 

복지에 대한 강한 요구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흐름이 하나가 아닐까?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살벌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다. 나쁘게--혹은 보수적 시각으로--이야기하면 발전하려는 진취적인 태도를 잃고 현상유지에 매달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계급이 정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계급을 넘어 성공할 수 없으니, 계급 안에서의 안정된 삶을 꾀하는 것이다. 물론 삶의 기초적 기반만 유지된다면 그런 구조의 사회도 안정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이미 이 단계에 들어선 지 오래며, 우리도 이제는 이런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80과 20이라는 말이 처음 나올 때는 애써 눈감던 사람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99%라고 칭하며 1%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동안 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1%의 상류층이 이토록 질시와 분노의 대상이 된 적은 한국 역사에서 이제껏 없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계급을 진지하게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정치의 혼미를 넘어

 

2012년의 선거는 어떻게 될까? 선거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는 좋아하지 않지만, 올해의 선거만큼 다른 것 같다. 세계적인 격변기에, 한국 사회의 지난 모순들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계급분화라고까지 할 만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에 대한 요구도 어느 때보다 높다.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강렬한 갈망이 있다.

 

 

현재 정치에서 주된 테마는 분명 ‘반MB’이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단순히 MB를 몰아내는 것 이상의 요구가 존재한다. MB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반칙과 폐단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고, 균등한 기회 보장과 정당한 보상, 그리고 안정된 삶을 바라는 마음들이 있다. 주지할 것은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시장법칙에 근거한 기회와 보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시장에서의 분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공정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다소 주관적인 ‘정의’이다.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대략 말한다면, 열심히 살고 있는데 생활이 어려운 것은 불공평·불합리하며, (자신이) 수긍할 만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기업들이 열심히 사는 소상공인을 몰아내는 일은 이런 기준으로는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냉혹하게 평가하고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시장질서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기준에서 미달하거나 경쟁에서 탈락하면 그대로 비참하게 패배해버리는 이 살벌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어하고 있다. 작년 한 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코드가 위로와 공감이었던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또한 작년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자살이 늘어났던 것은 이제 사람들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이 세상이 바뀌길 원한다. 박정희류로 대표되는 옛 권위주의체제와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을 살벌한 경쟁사회로 만들어온 신자유주의체제가 이제는 모두 정리될 때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이에 대한 뚜렷한 비전은 없이 반MB라는 기치만이 덜렁 서 있을 뿐이다. 물론 정당들이 앞 다퉈 좌클릭 경쟁을 하며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출총제 같은 기존 제도의 부활이나 재벌에 대한 규제 정도라서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깊은 고민에 나온 비전과 철학은 없이 상대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야당만이 아니다. 지금 정말 우습게도, 자신의 지지정당이 좋아서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예뻐서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미워서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 새누리당 지지자도 마찬가지다. 좌빨 세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는 많지만 새누리당을 지지한다. 양대 정당의 철학과 행보가 자신들의 깊은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지지는 대체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울며 겨자먹기식 지지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치고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온다. 안철수 바람은 그 위기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기존 정당들이 시대적 과제에서 무능함만을 보여줄 때 극단적인 해결책은 더욱 매력적이 된다. 파시즘 운동은 항상 그런 토양에서 자라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가 중요한 시기이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치이다. 서로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는 시장에서만 적용되며, 그것도 외부의 정치적 규제로 시장질서가 확고해졌을 때만 가능하다. 경제적 행위의 결과로 한쪽의 피해가 누적되고, 사회가 적대적인 두 계급으로 나누어질 때 이를 해결할 길이 무엇이겠는가? 강자들의 전횡으로 약자의 권리가 짓밟히고 불이익을 볼 때 이를 시정할 대책은 무엇이겠는가? 공동체의 미래가 어두울 때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결정할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정치는 공동체의 삶을 결정한다. 다행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있다.

 

 

어떤 이들은 2012년 선거가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가 될 것이라고 본다. 중대선거는 새로운 사회적 쟁점이 형성되면서 정치사회의 방향을 전환하는 선거를 일컫는다. 우리 사회는 지금 중요한 길목에 서 있다. 정치가, 구체적으로는 앞으로 있을 두 선거가 중요한 쟁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선택의 장이 되어야만 내일로 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누군가를 응징하고 심판하는 무대로만 그친다면 승리의 쾌감은 만끽하되 여전히 우리는 혼미한 상태에 빠져 비틀거릴 것이다. 진심으로 정치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미 FTA, 2007년의 어느날과 오늘.

2007년 3월말쯤에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수 년간 끌어온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동안 협상 과정에 관심을 가져오고 몇 번의 반대 행동에도 참여했던 나는 그날도 안국역 근처 어디선가 있던 반대 집회에 갔다. 몇백 명 정도 모인 그 집회에 별다른 힘은 없었다. 청와대 쪽으로 가는 길은 이미 경찰로 봉쇄됐고, 사람들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익숙한 집회 프로그램을 반복했다. 발언, 구호, 율동, 민중가요,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고 새벽녘에 사람들은 흩어졌다. 특별히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토록 중대한 협상을, 그렇게 졸속으로, 수많은 반대를 무시하고 진행한 정부에 대한 불만에, 한미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지긋지긋한 선전과 미화에 화가 나서, 그 마지막 풍경을 지켜보고자 나갔을 뿐이다. 그렇게 타결된 이후에도 부족함을 느낀 미국측의 요구에 몇 번의 추가 협상을 했고(노무현 때도, 이명박 때도 했다), 한국 국회의 비준만을 남겨둔 오늘에 이르렀다.


2007년의 그때는 서럽고 외로웠다. 한미 FTA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집권 내내 부딪혀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한미 FTA에 한해서는 한목소리였다. 여당 내 천정배 정도의 의원만이 반대 목소리를 냈다. 노무현 죽이기에 열과 성을 다하던 조중동도 한미 FTA에는 칭송을 마다 않았다. 미국에게 너무 많은 걸 양보한 협상이며 투자자국가제소제가 주권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몇 년간 외쳤지만 정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중앙일간지를 도배한 FTA 홍보 광고에 위험성을 지적한 내용들은 괴담 취급당했다.'그건 다 오해'라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가카가 아니라, 노무현 전대통령이 말이다. 한줌도 안 되는 진보세력만이 한미 FTA 반대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냥 깃발만 나부꼈다.


지금,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아니고 5년도 안 지났지만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당시 참여정부 인사들 모두가 앞장서 한미 FTA는 굴욕적 협상이고 투자자국가제소제는 독소 조항이라고 외치는 데 나는 좀 어안이 벙벙하다. 그때는 '우리 노 대통령이 그럴 리 없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명박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이야기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좋아해야 할 일일진대, 가슴속 한켠이 불편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변신' 과정을 해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정말 진정으로 변했는지(즉 ISD가 정말 독소조항이고, 한미 FTA가 자본에 지나친 자유를 주는 나쁜 조약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황상 잠시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신뢰가 싹트지 않고 의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와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냐고 말들 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셍각하자면 중요한 것은 한미 FTA의 국회 비준을 막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선 보탤 수 있는 힘은 다 보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일 관계를 놓고 흔히 말하듯 과거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미래로 가기 위함이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명박의 FTA와 노무현의 FTA는 큰 맥락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활동의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자본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조약이며, 한국의 경제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선진적인 금융경제 시스템'으로, 개조하는 첫 발이다.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미국에 '선물'을 더 많이 줬다고 해서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명박의 FTA와 노무현의 FTA가 다르다는 전제로 반대에 나서는 것은 논리에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당장 민주당의 FTA 반대가 자가당착이라는 보수언론의 공세에 대응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이유로 한미 FTA를 반대하려면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문제를 인정해야만 한다. 반성 없이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해서 이들은 정말 한미 FTA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이명박 반대를 위해 한미 FTA를 이용하는 것일까? 행동하는 양상으로 보건대 많은 이들은 후자 쪽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한미 FTA를 단지 이명박을 깔 '소스'로만 활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그 목적이 다하면 한미 FTA 자체는 어찌 돼도 좋다고 여기리라고 예상하기에, 한미 FTA에 대한 비등한 반대 여론이 기쁘지만은 않다.

재보궐 투표 단상

안철수 또는 박원순이 사람들을 투표장을 많이 불러 모았는가?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48.5퍼센트였다. 높은 수치이지만 지난 4월 열린 분당을 재보선보다 1퍼센트 낮다. 물론 안철수 같은 다수의 대중들이 아는 메이저급 인사가 선거에 대한 관심을 올리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학규가 출동한 분당을 재보궐에서 달성한 수치를 넘지는 않았다. 안철수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열망이 투표율을 올렸다는 분석은 섣부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민들의 여야를 막론한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은 분명한 신호로 나타나고 있다.



SNS는 대중의 정치 참여에 영향을 주었는가? 그런 것으로 보인다. SNS에서 유통되는 정보와 투표 독려 분위기는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앞선 두 번의 재보궐 선거는 10년 동안 벌어진 재보궐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이 수치는 단순히 SNS의 영향력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강렬한 반감에서 비롯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SNS는 정확히 얼마만큼의 영향을 줬는가? SNS가 없었다면 투표율은 얼마나 됐을까, 혹은 각 후보의 득표는 어떻게 됐을까 이런 점들이 파악이 돼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SNS의 위력, 선거혁명이라고 대충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SNS가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심층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저널리즘일 것이다. SNS에서 얻은 정보로 지지후보를 결정했는지, 혹은 그 때문에 투표를 하게 됐는지 등. 역시 중요한 것은 실증 증거다.


19세

20대 전반

20대 후반

30대 전반

30대 후반

40대

50대

60세 이상

평균

10 지선

47.4

45.8

37.1

41.9

50.0

55.0

64.1

69.3

54.5

08 국선

33.2

32.9

24.2

31.0

39.4

47.9

60.3

65.5

46.1

07 대선

54.2

51.1

42.9

51.3

58.5

66.3

76.6

76.3

63.0

06 지선

37.9

28.3

29.6

37.0

45.6

55.4

68.2

70.9

51.6

04 국선

-

46.0

43.3

53.2

59.8

66.0

74.8

71.5

60.6

02 대선

-

46.0

43.3

53.2

59.8

66.0

74.8

71.5

70.8

02 지선

36.3

27.0

34.5

44.8

56.2

70.0

72.5

48.9

00 국선

39.9

34.2

45.1

56.5

66.8

77.6

75.2

57.2


구할 수 있는 자료로 지난 10년간 선거율 추이를 정리해봤다.

지방선거만 놓고 봤을 때 40대 미만은 투표율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40대 이상은 소폭 감소했다. 06년도 지방선거 역시 02년도 지방선거보다 투표율이 상승했지만, 젊은 층의 투표율 상승폭은 10년이 압도적으로 크다.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SNS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젊은 층 사이에서 MB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아마 복합적일 것이다. 50대 이상의 투표율은 어느 선거에서건 별다른 반동 없이 지속적으로 감소 중이다. 정동영의 말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 지금 20~30대 투표율의 급속한 상승은 2~3년 사이의 결과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추세일지는 알 수 없다. 20~40대는 상황에 따라 투표율이 크게 달라지며, 지금의 경향은 투표를 해야 ‘개념인’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인증샷을 올리면서, 놀이처럼 투표를 하고 유행처럼 투표를 한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분명히 SNS이다. ‘나는 투표했다’라는 과시를 할 수 있으니까. 투표를 하는 것이 촌스럽고, 유치한 것이 되는 분위기라면 이들의 투표율은 낮아질 수 있다. 하기야 이런 여론을 주도하는 사회지도층(대중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들이 계속 투표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겠지만.


짐작해보건대 아마 내년 총선은 60~65퍼센트 사이의 투표율일 것 같고, 대선은 70~75퍼센트 사이일 것 같다.



서울시장 선거는 어쨌든 SNS 여론이 강력히 지지한 박원순이 당선됐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재보궐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결과도 거의 다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SNS라는 공간은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RT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비슷한 생각들이 확장되고 폭발력을 갖는다. 대단한 집중성을 보이지만 너무 비슷한 생각끼리만 유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SNS는 새롭게 나타난 시민사회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역시 공간의 하나, 혹은 시민사회의 한 측면일 뿐이다. 새로운 공간은 대체로 ‘진보’가 먼저 선점하나, 곧이어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고 혼탁해진다. 이 뉴미디어가 현재 이것들을 찬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의 순기능을 할지는 알 수 없다.



과거 노무현 정권은 지지자들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이명박 정권은 그 반대자들에게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다. 환멸한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간다. 물론, 보수세력의 지지자들은 언제나 거의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세력의 지지자들이 분노하게 됐을 때 투표율이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심증을 세워본다. 환멸이 극에 달한 17대 대선과 08년 총선의 낮은 투표율, 탄핵 역풍이 분 04년, 작년의 지방선거와 최근에 벌어진 두 건의 재보궐 선거에서 상승한 투표율을 그 반증으로 생각해본다.



02년도 대선서부터 지금까지 20대 후반의 투표율이 가장 낮았다.(20대 초반보다도) 최근 다른 세대와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가장 낮은 수치다. 이번 재보궐은 아직 통계가 안 나왔지만 아마도 추세는 비슷할 것 같다. 02년도의 20대 후반은 지금은 3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의 투표율이 낮은 것은 그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구조적인 원인일 수 있다. 예컨대 취업준비와 사회 진출 등으로 생활이 가장 바쁜 시기가 그때라서 투표율이 낮을 수도 있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투표도 여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증거들이 여럿 있다. 투표율은 부유층이 더 높고 빈곤층은 낮다. 강남3구의 투표율이 높은 것은 그들이 투표할 여유가 가장 많아서일 수도 있다. 빈곤층이 자신의 이익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투표에 신경 쓸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이다. 선거일에도 상관없이 편의점에서 일해야 하는 알바생이나 택배기사가 투표할 수 있겠는가? 또 노년층의 투표율 감소는 증가하는 노인 빈곤과 관계가 있을까? 양극화에 따라서 투표율 분화 역시 일어날까? 이것도 조사해볼 만한 주제 같다.



이명박 정권 이후 정치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시민사회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고 긍정적이다. 삼삼오오 모이는 여러 형태의 시민 모임들도 늘어난 것 같다. ‘깨어 있고자’ 하는, ‘의식 있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의식의 양극화랄까, 여전히 관심 없을뿐더러 반동적이기까지 한 사람들과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 꼭 투표합시다!’ 이런 사람들 사이의 갭이 커진 것 같다. ‘좌빨들 ㅋㅋㅋ’ ‘슨상님 ㅋㅋ’ 하며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이 한나라당 알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한편으로 정치에 관심 있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실제로 정치 구도는 더 단순해졌다. 좌빨 아니면 수꼴이라는 편가르기가 심해지고,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꽃피기보다는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모호한 이분법이 정치 판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 ‘상식인’들을 분열시킬 수 있는 주제들(FTA, 원자력, 구조조정,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 주한미군, 낙태, 동성애 등)은 ‘일단’ 잠복해 있다. 이 분위기를 이해하면서도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가 없는 제도에서 양당제로의 수렴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런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단순한 투표율 제고를 넘어 정치적 다양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로 보인다.


그녀가 크레인 위에 있다- 자본과 인간의 삶

그녀가 크레인 위에 있다. 김진숙. 쉰둘의 여성노동자.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었으며 20년을 해고노동자로 살아온 그녀가 200일을 넘게 크레인 위에 있다. 뜨거운 폭염으로 크레인이 달궈질 때도 무시무시한 폭우가 쏟아질 때도 그녀는 크레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녀의 투쟁의 자리이며, 삶의 자리이고, 동지들이 숨을 거둔 죽음의 자리이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가 서 있는 85호 크레인은, 과연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 한진중공업이 행한 400여 명의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기 위해, 김진숙과 10여 명의 노동자들은 크레인에 버티고 서 있다. 노조 집행부는 이미 사측과 타협하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음에도, 그녀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포기하지 않고 있다.



김주익과 김진숙, 8년의 시간과 똑같은 이유


현재 '희망 버스'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야기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농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 그녀가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에 8년 전 김주익이라는 또 다른 노동자가 지금과 똑같은 이유로 올라가 있었다. 600여 명의 정리해고와 노조 탄압에 반대하며 싸움을 이어가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지금과는 달리 많이 알려지지 못한 그 투쟁은 이른바 운동권들 사이에서만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 크레인 위에 올라간 지 129일째인 어느 새벽, 그는 크레인 운전석 안에서 스스로의 목을 맸다. 김주익. 한 사람의 노동자이자 한 가족의 가장은 그렇게 '열사'가 되었다. 나 역시 2003년 어느 때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는 대자보를 학교에서 본 기억이 새록하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 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준엽아. 혜민아. 준하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적어보는 이름이구나.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 바란다.


그리고 여보.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서야 불러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칭이 되었네. 그동안 시킨 고생이 모자라서 더 큰 고생을 남기고 가게 되어서 미안해. 하지만 당신은 강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잘 해주리라 믿어. 그래서 조금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애.

이제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막내 누나를 만날 수 있을 꺼야. 그럼 모두 안녕."



김주익은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지막까지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리고 그 후에 아버지를 대신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준 사람이 있다. 어느 잘난 부자나 자선사업가, 정치인이 아닌, 그와 똑같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이는 다른 동료들과 19만 3천 원을 모아 세 아이에거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했다. 그이가 바로 지금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이다. 부자도 정치인도 김주익을 외면하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외면했지만, 역시 잘날 것 없는 노동자인 그이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 후 그녀는 김주익과 똑같은 이유로 크레인 위에 올랐다. 그러나 "김주익 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겠다"고 말하며 반드시 승리하여 살아내려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자본과 인간의 삶

8년 전 김주익이 죽은 것도(그리고 김주익이 죽은 지 15일 후에 곽재규라는 또 한 분의 노동자가 투신자살을 했다), 그리고 김진숙이 지금 크레인 위에 있는 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동일하다. 정리해고. 그들의 싸움은 자신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폐기하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이다. 한진중공업이 1989년 영도 조선소를 인수한 이후 그곳의 노동자는 3200명에서 현재 670명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자연적 감소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는 수백 명을 한꺼번에 짜르는 정리해고가 있었고, 그에 대항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김주익과 곽재규는 그 투쟁에서 목숨을 버렸고, 김진숙은 200일 넘게 크레인 위에 버티고 있다.


한진중공업이 실행한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 내용은 이미 여러 곳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더 말할 필요도 없다(간단히 알고 싶다면 이곳을 참조). 그리고 사실 부당하든 부당하지 않든(혹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 사회에서 모든 정리해고는 해고당하는 노동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사회적 악행이다. 재작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는 분명 회사가 망하게 될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라도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절절한 진실이다. 실제로 그때 이후 15명의 해고 노동자가 자살과 여타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기업에, 또는 자본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으며, 자본으로부터 외면 혹은 버림받을 때는 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받는다.


그렇다, 이게 중요하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시스템의 핵심은 무엇보다 노동의 상품화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으며, 그것을 자본(기업)이 사줘야만 생계를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기업)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기업가들이 자신 있게 주장하듯, 기업은 고용창출을 해서 사회에 기여하며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기업(자본) 활동이 활발할 때 그 사회의 절대적 풍요도 증가하며, 기업(자본) 활동이 부진하다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의 생계는 자본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자본가이며, 더 크게 보자면 이른바 시장의 논리이다. 때문에 경기변동이나 해당 자본의 투자 방향 변화, 또는 한진중공업의 사례처럼 사업의 해외이전 같은 외부적 원인으로 인해 그 자본에 의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한꺼번에 출렁인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그 노동자들이 사는 사회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은 자본에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바로 그 자본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그 결과는 무엇인가? 삶의 지독한 유동성, 불안정성, 인간관계의 피폐화와 소외, 인간의 도구화. 그렇게 해서 인간의 삶은 '악마의 맷돌'에 갈려버린다.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본, 노동자, 국가- 신성한 삼위일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이어진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금융 위기로 미국 금융 시장은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미국 정부는 수천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여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금융 회사들을 살려냈다. 미국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금융시장 호황으로 인한 이익을 맘껏 향유하며 수백수천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시장의 부실을 예측하지 못하고 거품을 키워온 당사자들을 세금으로 구제한다? 게다가 그들은 금융 위기에도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겼다. 미국인들은 이런 도덕적 해이에 분노하며 구제금융을 실시한 미 의회와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했다. 경제위기의 주범을 국가가 살려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런 항의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존재한다. 브레이크 없는 금융자유화를 추구하며 탐욕을 충족시켜온 금융자본에 위기에 대한 지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Too Big to Fail. 그들은 망하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 컸고 사회 전체에 너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을 망하게 되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금융시장이 붕괴될 게 뻔했고, 그 피해는 그융투기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그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파국은 막아야 했다.


비슷한 상황을 한국도 경험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직접적인 원인 고리 중 하나는 기업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며 끌어쓴 돈을 갚지 못하며 일어난 연쇄 부도 사태였다. 신용경색 상태에 이른 많은 기업들과 그들에게 무리한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고 그들을 망하게 한다는 건 한국 경제사회의 파국을 뜻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한 것은 무엇이었나? 수조 원의 세금을 구제금융으로 지급한 정부, 그리고 그 세금을 내고 심지어 금모으기 운동까지 한 국민. 즉 전체 사회였다. 망할 기업은 망했지만 살아난 기업은 체질개선을 한 덕에 이후 더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1997년 이전의 삼성, LG, 현대 등과 그 10년 후의 그들은 위상이 전혀 다르다. 한국 안에서만 놀던 그들은 지금은 세계 유수의 기업이다. 그러나 그 성장의 과실은 전체 사회에 분배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됐다.


이상의 사례들은 마르크스의 지적을 확인해준다. 자본이 거대화, 고도화될수록 그것이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진다. 즉, '자본의 사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은 여전히 사적 소유물로서 그 자본을 소유한 개인(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다. 그 개인(들)의 판단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전체 사회가 떠안고 해결하지만, 반면에 자본이 거둔 이득이 전체 사회에 반드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른바 '피해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라는 구절은 이런 모순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모순으로 인해 경제는 격동하고 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고 판단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 경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의 발달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다.



비록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마르크스의 제안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철도나 도로, 전기, 수도 같은 특정 자본(생산수단)은 국가가 소유하며, 사적 자본도 일정 정도 통제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국가와 자본이 결합한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을 관리해야 할 국가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자본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밖에 없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시스템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한 것에도 분명 진실이 담겨 있다. 자본의 활동이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려는 것이 그 시스템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GM의 회장은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진실성 여부에 어떻든, 당시의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런 경제 시스템을 추구하려 했다. 국가의 주도 아래 자본과 노동의 이해 관계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 시스템의 목적이었다.

세계화된 자본의 시대


고도로 발달하고 거대해진 자본은 사회 전체에,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소수의 손에서만 맡겨서는 안 되며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자본의 사정으로 사업이 중지되고 수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사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명백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고 명백히 나와 있는바, 그런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까? 자본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공동 소유로 나간다고 해서 자본이 자동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하는 방향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사용을 민주주의적으로(혹은 공동체적으로) 결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한계가 있는 한 인간(그리고 인간의 모임)이 결코 '사회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을 알 수 없으며, 자본의 사용을 '자유시장'이라는 기구에 맡기는 것이 유일하게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자동으로 결정되는 가격과 이윤이 사회를 저절로 이상적인 방향으로 굴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설령 시장의 작동이 문제를 일으키더라도(마르크스가 말한 사적 소유의 모순 같은),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개선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자본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시장 이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맡겨라! 자본의 사적 소유와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이 아무리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신자유주의는 말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실패의 길을 걸으면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세계 각국 경제 정책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점차 줄어들고, 시장질서는 침해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존재가 됐다. 여기에는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교통과 통신이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면서, 특히 인터넷으로 인해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면서, 자본의 이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자본은 국가 단위를 훌쩍 넘었으며,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국가 간 이동도 (특히 금융 영역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글로벌한 세계 시장이다.


다시, 인간의 삶과 자본으로


길게 돌아왔지만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자, 오늘날 글러벌한 세계 시장은 신자유주의의 약속처럼 최선의 결과를 내놓고 있을까? 불행히도, 그리고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의 자유로운 사용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크레인 위에 올라간 김진숙은 온몸으로 그 사실을 절절히 외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여전히 인간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계속해서 자본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아직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는 바는, 비록 우리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자본의 보편적 사용법은 알지 못하더라도, 단기적이거나 특수한 국면에서는 그 사용법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시 상황이나 개발도상국의 경제 부흥 시기에는 계획경제가 시장경제가 내놓지 못하는 훌륭한 성과를 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장하준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경제 선진국이 초기에 계획 경제 정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걸 잘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즉, 시장에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교조적인 주장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의 상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련이 채택한 일국 사회주의 경제는 체제 경쟁에서 처절히 패배하고, 오히려 민중들을 착취하면서 실패로 들어갔다. 더욱이 오늘날의 '글로벌한 세계' 시장은 각 국가들이 20세기 초중반에 택했던 국가 주도의 자본과 노동의 타협(북유럽의 복지 국가로 대표되는)이라는 해결책을 점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장기적으로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고 생산을 해외로 돌릴 계획이다. 지금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는 일감이 없어 정리해고를 하지만, 필리핀에 새로 지은 수빅 조선소에서는 과로사로 노동자가 죽어나갈 정도로 일감이 몰려 있다.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 더 싼 노동력을 찾아나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달리 말하면,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정리해고되고 김진숙 씨가 이에 저항하며 크레인 위에 올라간 것은 이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본의 운동으로 인간의 삶이 흔들거리는 일은 오늘날 국제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자본이 세계화되면서 국민국가는 심각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민을 책임져온 국민국가는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본에 개입해왔지만 이제는 그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초국적 자본은 한 나라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은 왠만한 국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국민의 전반적 삶을 책임지는 국민국가의 책무를 면제해주고 있다. 이제 각자의 삶은 각자가 꾸려가는 것이며, 국가는 단순히 질서의 관리자(테러나 범죄에 대응하는)일 뿐이라는 새로운 국가관이 출현했다. 그렇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문제처럼, 그리고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문제처럼, 자본의 국제적 운동은 사회 공동체에 점차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고 있다.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누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지는 아직까지 미궁에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요구하며 김진숙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


나로서는 비현실적인 두 가지 해결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는 세계화된 자본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적인 연합 내지 기구. 그러나 G20 회의에서도 보듯, 한 국가를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각국의 이익을 최우선할 뿐 공동의 행동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한다. EU조차도 최근의 위기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길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 정부가 탄생하지 않는 한 이런 연합 내지 기구는 계속 삐걱거릴 것이다. 둘째는 자본의 국제적 운동에 대응하는 국제적 노동, 사회운동의 발달. 전자가 '위'로부터의 대응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대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비해 노동은 턱없이 한 나라, 한 조합 안에 갇혀 있다. 노동운동의 국제적 조직화는 난망하기 이를 데 없으며, 현재로서는 거의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세계화된 자본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그 필요성은 더욱 대두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크레인 위에 있다. 사회의, 세계의 답을 요구하며 그 위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노동자가 계속해 답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크레인 위에 올라갈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를 수는 없다.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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