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확대의 이면
'일자리를 늘리겠습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선거철 후보들의 공약에는 이런 내용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일자리 만들기는 여러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하는 당연한 말이 됐다. '좋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같은 구호는 거의 진실처럼 받아들여진다. 만연한 실업과 불안정노동의 시대에, 이 구호는 분명 일정한 진실을 담고 있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정치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일자리 확대는 정치인의 의지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일까?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이 아닌 한,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선 산업을 확대하고 따라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이 좀 더 선호하는 공공 서비스의 확대라는 방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새로운 산업의 성장, 새로운 시장의 개척 없이는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 일자리 확대의 요구는 사실 산업을 발전시키라는 요구와 다름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점은 이것이다. 시장의 확대는 긍정적인가? 그래서 시장을 확대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시장의 확대는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이윤 추구의 법칙은 자본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만든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장이 필요하다. 확대, 그리고 또 확대.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 과정은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과정이 멈추는 것은 공황이라는 무시무시한 재앙 때뿐이다.
시장의 끝없는 확대
우리는 역사에서 그 과정을 봐왔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정복은 그 과정의 단적인 예이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전통적인 경제 시스템을 파괴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식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보 경쟁은 세계대전을 촉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장의 외적 확대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WTO, FTA를 통한 무역 규제의 철폐는 시장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이 과정이 쌍방향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잘 알고 있듯이, 일방적인 시장의 확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한미 FTA로 한국 자동차 회사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커질지 모르지만 농업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줄어들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이는 ‘시장의 통합’이지 새로운 시장의 창조는 아니다. 시장이 커진 만큼 경쟁자도 늘어난다. 능력 있는 자는 넓어진 시장을 이용할 테지만 퇴출당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 국가의 경제 성장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 효과 역시 이중적이다. 소비 시장이 늘어나는 만큼 생산자도 늘어난다.
지구상에 더 이상 새롭게 개척할 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외계 행성이라도 발견하지 않는다면, 시장의 물리적 확대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면 시장의 확대도 멈출 것인가? 그리고 더 이상의 발전도,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새로운 시장의 창조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예컨대 30년 전에 노래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지금 사람들의 노래 생활은 노래방에 의존하고 있다. 20년 전 휴대폰이 없었으니 휴대폰 시장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휴대폰이 만들어지고 보급되면서 지금은 가전회사의 핵심 시장이 되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남성 화장품을 만들어 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성들도 자연스레 화장하는 시대다.
이렇듯 새로운 기술의 출현과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혁신과 창조가 없이 자본주의는 존속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업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전에는 없던 것, 새로운 상품, 새로운 오락, 새로운 서비스가 정말 눈이 돌아갈 만큼 현란하게 계속 출현한다.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선사한다.
삶의 시장화
그러나 자본주의의 창조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휘되지 않는다. 먼저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도 창조해낸다. 필요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필요가 나타난다. 각종의 마케팅 기법이 이를 조장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많아질수록 자본주의는 발전한다. 더 많은 옷, 더 많은 시계, 더 많은 차, 더 많은 가전제품… 상품은 갈수록 세분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갖추게 한다. 또 제품의 수명이 짧아지고 더 자주 사게 된다. 시장은 그런 식으로도 확대된다. 그러나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가 올바른가 하는 도덕적 물음은 차치하고서라도, 환경운동가들이 경고하듯 그것은 지구 자원의 소모를 가져온다.
사회문화적 변화는 또 어떤가? 남성의 화장품 같은 건 사소한 예일 뿐이다. 이전에 사람들이 시장과 관계없이 하던 일들이 시장의 영역에 들어간다. 내가 어릴 적에 친구들끼리 노는 데는 별다른 돈이 들지 않았다. 다방구, 짬뽕, 와리가리, 얼음땡… 이런 다채로운 놀이들은 아주 간단한 기구와 친구들만 있으면 즐겁게 놀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PC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논다. 아이들이 시장의 고객이 된 것이다.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가정의 일도 많은 부분 시장화됐다. 아기 기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식의 비율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빨래방도 늘어나고, 집안 청소도 회사에 맡긴다. 그렇게 보육 산업, 외식 산업, 빨래 산업, 청소 산업은 성장했고 관련된 일자리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삶을 시장에 맡기게 되는 변화가 바람직한 걸까?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시장에 의존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고 더 자주 살수록 자본주의는 발전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삶의 시장화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자본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삶, 사회, 시장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자, 질병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의 답은 당연히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이들이 건강하게 살다 죽는다면, 의료 산업은 심각하게 타격을 받을 것이다. 또 말해보자. 범죄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범죄가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말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그러나 범죄가 없다면, 모든 방범회사들은 망할 것이고, 대다수의 경찰도 필요 없어져 해고될 것이다. 사회는 평화로울지라도 그들의 가정은 파탄날 것이다.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료산업이 이익을 위해 사람들에게 병을 일으킨다든지, 방범회사가 범죄를 조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경찰력은 더욱 필요해지고, 평균 수명의 증가와 현대의 생활방식으로 새로운 의료적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물론 ‘~~증후군’ 같은 사소한 질병을 강조하고, 사회적으로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겠지만) 다만 ‘산업적으로’ 좋은 것과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 전혀 상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전쟁 산업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세계가 평화로울수록 전쟁 산업(록히드 마틴, 보잉, 더글라스 등)은 망해갈 것이다.
이런 경우는 더 있다. 아마 혁신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의 발전은 환경과 에너지 절약에는 좋지만 자동차 산업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수소에너지 또는 핵융합 에너지의 개발은 정유회사와 산유국에는 악몽이 될 것이다. 생수와 정수기 산업이 발전하는 것보다 상수도가 신선한 물을 공급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학력주의 사회가 바뀐다면, 학생들은 좀 더 멋진 학창시절을 보내겠지만 학원들은 좀 더 우울해질 것이다. 외모지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성형업계와 미용업계는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등등. 요약하면 이렇다. 여러 산업이 발전한 사회가, 그래서 그런 각 산업에서 많은 일자리가 생기는 사회가 반드시 좋은 사회는 아니다.
좀 더 내밀한 삶의 영역을 이야기해보자. 다소 보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이는 집에서 부모의 무릎 아래 자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훌륭한 어린이집과 보모도 부모만큼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맞벌이의 증가를 이해는 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가정의 삶에 좋은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인디언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립이든 공립이든 현대의 보육 시스템이 아이들에게 그만한 상호작용을 선사할 수 있을까? 전반적인 집안일도 시장에 떠맡기는 것보다 가족이 함께 이럭저럭 처리해나갈 때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놀이는 또 어떨까? 화려하고 비싼 장난감이나 게임기, pc방이나 키즈카페 같은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공간이 없어도, 즐겁게 놀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창조력은 발휘되는 게 아닐까? 모모의 친구들이 원형극장 터에 모여들어 놀이를 만들어내 놀았듯 말이다.
시장은 편하다. 돈만 내면 모든 걸 해결해준다. 부모가 앓아누웠다고 해서 힘들게 직접 간병할 필요가 없다. 전문적인 간병인이 대신 더 잘 돌봐줄 것이다. 장례 역시 요즘은 전문업체에서 알아서 다 대행해준다. 장례 의식을 함께 준비하고 거행하던 전통적인 사회적 공동체는 사라졌다. 내 돌잔치 때 어머니는 직접 집에서 음식을 하고 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치렀다. 지금은 식당에서 쉽게 해결한다. 명절 때 예전에는 친척들이 모여 함께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마련했다. 나도 옆에 끼어 거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제사상을 통째로 주문할 수 있다. 친척들은 잠깐 모여 차례를 지내고 헤어질 뿐이다. 심지어 제사 자체를 대행해주기도 한다. 돈을 주면 가족도 돼주고 애인도 돼줄 판이다.
이것이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하고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앙상해지는 게 아닐까? 불편하고 비효율적일지라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때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까? 시장의 영역이 넓어지고 거기에 의존하게 될수록 우리는 삶을, 가족적․사회적․정치적 삶을 시장에서의 거래로 대체하게 된다.
일자리가 없어도 되는 사회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시장에 의존하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는 생명줄과도 같다. 일자리 확대를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로 두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시장을 확대시켜야 하는데, 나로서는 모든 시장의 확대가 긍정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시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시장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곳이다.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필요로 하는 것이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 시장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사회보다, 필요한 것이 적은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금욕 내지 무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보육원이나 보모를 많이 구할 수 있는 것도 좋겠지만, 부모가 직접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자가용을 많이 사고파는 사회가 아니라 자가용이 별 필요 없는 환경이 더 낫지 않나? 결혼정보업체가 여러 남녀를 연결시켜주지만, 그런데 의존하지 않아도 자기 짝을 구할 수 있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결혼식에서 주례도 고용하고 하객도 고용한다고 한다. 그보다 주례를 부탁할 선생님이 있고, 찾아올 친구들이 많은 게 더 행복한 삶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일자리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해주는 역할이다. 대신 운전을 하고, 대신 가구를 만들고, 대신 청소를 해준다. 그런데 그렇게 각자가 각자의 일을 대신 해주는 건 좋은 일일까? 효율성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대신해준다면 의미가 많이 달라지는 일들이 있다. 스스로 처리했을 때 ‘인간적인’ 면에서 좋은 일들이 있다. 청소부에게 돈을 주고 집 앞 청소를 시키는 것과 직접 빗자루로 집 앞을 쓰는 것은 분명 그 사람에게 주는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게―즉,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일을 대신 맡기는 게―마냥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나는 시장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장의 증가와 발전을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폴라니 식으로 이야기하면 시장은 사회적 도구이며, 도구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도구가 모든 곳에서 긴요하고 필요한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듯 정말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살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삶에서 맺는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사랑, 우정, 추억, 신뢰, 지혜, 관용, 사려, 창조성… 그리고 그 밖에 많은 것들도. 시장에의 과도한 의존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얻고 쌓아나갈 기회를 박탈하지 않을까 나는 우려스럽다.
결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시장이 역할을 확대해나가면서 인간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다고. 옳은 말이다.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옷을 짓고, 스스로 자기 집을 만들던 과거의 자급자족 사회가 결코 천국은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자연의 제약에는 심각하게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는 데 삶의 전부를 바쳐야 했다. 인류는 사회적 분업을 실시하고 자본주의가 그 과정에 가속도를 붙이면서 그런 과정을 과거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끝이 보이지가 않는다. 시장은 끝없이 확대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는 돈을 주고 해야 하리라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들을 이제는 돈을 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삶이 다양해지고 풍요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시장은 놀랍도록 다양한 상품을 내놓으니까. 헤어스타일을, 레저를, 문화를 시장에 맡기면서 각각이 얼마큼 다양해졌나? 이제는 각자의 세세한 기호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돈을 벌고 상품을 소비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불구로 되어가는 건 아닐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모두 시장에 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돈만 있으면 된다. 진행되는 사회적 분업은 삶의 모든 것을 시장으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오래전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 인간을 몇 가지 단순한 일에만 익숙해지게 해서 “둔해지고 무지하게” 만들고 “정신은 마비상태에 빠져 어떠한 이성적인 대화를 즐기거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그럽고 부드럽고 고상한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없게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건 고작 일터에서의 분업일 뿐이었다. 삶의 영역 자체가 시장화되면서 우리의 인간성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왔고,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일들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이란 얼마큼 다양하고 많은 상품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얼마큼 깊고 지실되게 삶을 경험하고 즐기느냐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의심하며,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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