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잡담


 

1.

내가 길지 않은 인생에서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증오는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설령 '악(惡)'에 대한 증오라 할지라도.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과 사랑을 주는 사람 모두를 살찌우는 것과 정확히 반대로 증오는 증오를 받는 사람도, 증오를 하는 사람도 피폐하게 만든다.


작년에도 예전에 인터넷 상에서(그리고 물론 실생활에서도) 수많은 논쟁('키워')이 벌어졌다. 어떤 떡밥이 던져지고, 많은 이들이 득달같이 달겨들어 물어뜯고 질릴 때까지 헤집어놓고선 잠잠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떡밥이 던져지면 무한반복. 좋다, 이야기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이, 상대를 까고, 찧고, 부수고,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사람들의 태도, 논쟁에서 '승리'하려는 태도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거기서 상대에 대한 불인정을, 상대에 대한 증오를 본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보다, 같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오의 모습을 발견할 때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비난함으로써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인가, 싸우려는 것인가? 투쟁의 대상과 설득의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모든 시도는 실패다. 마른 나무에서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은 그 나무에 기울이는 사랑이다. 척박한 황무지를 기름진 옥토로 만드는 것은 땅을 일구는 농부의 사랑이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랑이다. 상대에 대한 관심, 인정, 배려, 진실한 자세.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자는 생(生)을 사랑해야 한다. 정치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복수, 원망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열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



2.

정치 또는 정당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에 입각한 정책과 방향으로 공동체를 운영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는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공동체의 구성원, 다시 말해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민주주의의 축제이다. 선거의 목적은 승리만이 아니다.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안적인 이념과 정책의 제시이다. 정당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념'을 추구하는 집단인 한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런 기본 사항을 덮어두고 하는 연대는 사실상 '야합'이다. 묻지마 연대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는 연대가 필요하다는 노회찬의 상식적인 말이 그렇게 욕을 먹어야 했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물론 생각과 추구하는 바에서 일치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연대는 가능하다. 다만 진보 정당의 지지자로서 나는 이명박 정권 퇴진이 목표가 아니며, 진보적 가치의 구현이 목표다. 불행히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내가 지키고 싶은 많은 가치들이 훼손되었다. 교육 및 보건의 공공성에 대한 믿음, 공동체, 노동의 안정성, 서로 돕고 사는 사회. 그리고 그 자리를 시장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 개인의 파편화, 전 국토의 투기화 등과 같은 것들이 채웠다. 공동체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자본의 논리가 사람들을 잠식해갔다.


안타깝게도 진보적 가치는 그 사이 점점 쇠퇴해갔고 지금의 위기에 도달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이제는 폐기해야 할 가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난 나의 신념을 믿는다.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혹은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에 맞게 변혁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다가오는 선거에서 그리고 다른 활동에서 진보정당과 언론, 진보 쪽 인사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나도 미약하나마 열심히 해야겠고. 

 

3.

'못생긴 사람이 싫다'와 '동성애자가 싫다'는 구조는 똑같을지라도 담고 있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못생긴 사람이 싫다'는 사실 '못생긴 사람과 사귀기 싫다'라는 의미이지 인간적으로 못생긴 사람이 싫다는 뜻은 담고 있지 않다. 엄마가 못생겼을 수도 있고, 형제나 친구가 못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싫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동성애자는 싫다'라는 언명은 동성애자의 모든 인격을 부정한다. 자기의 친구나 가족이 동성애자라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동성애 논쟁에서 놀라웠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개나 고양이, 혹은 짬뽕과 짜장면이 좋고 싫듯이 동성애자를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는 감정과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물에 대한 호오와 사람에 대한 호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인류의 윤리는 인간은 오직 인격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인종, 성별, 국적, 혹은 성적 취향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는 조센징이 싫어", "나는 쪽바리가 싫어"라는 언명과 "나는 게이들이 싫어"라는 언명 사이에는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말할 '자유'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명백히 '옳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일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어도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저능하고,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까운 하급 인종으로 규정했다. 남성들이 여성을 차별할 때도 비슷한 논리를 이용했다.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적대하고 차별할 때는 항상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부여했다. 2차 대전 시의 독일인들도 일본인들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할 때는 보통 종교적 규율을 근거로 들거나 자연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식의 이유를 든다. 내가 봤을 때는 오히려 그편이 더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냥' 동성애자가 싫다는 것이 나로서는 더욱 이상하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동성애자를 좋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당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해보고, 이유 없는 적개심은 버리는 것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당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감정상, 심정상, 역겨움과 불쾌감이 몰려오더라도, 자신의 감정을(그릇된 것이라면) 조절하는 것이 도덕적 삶의 기본이다. 물론 이것은 법의 명령이 아니라, 당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의 명령이다.


아울러 동성애자를 옹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멋있는 동성애자들이 자꾸 등장하는 것이다. 동성애자가 별종이 아니라는 것,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커밍아웃이 굉장히 의미 있는 행위인 거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도 직접 동성애자를 접한 적은 없어서, 막상 만나보면 까닭 모를 거부감과 불쾌감이 들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알아도 감정은 또 다르니... 그렇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그 사람을 '동성애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대하고 싶다.

 

 4.

올해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언제나처럼 작년보다 나은 한 해가, 작년보다 눈꼽만큼이라도 발전한 내가 되고 싶다.


    

by sonofspace | 2010/01/08 16:40 | 트랙백 | 덧글(0)

펀치다! 로보! 세계의 모순을 부숴라!!

 

세계는 파멸을 앞두고 있고, 호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막으려 합니다. 비뚤어졌지만 정당한 복수심에 불타는 악의는 거대한 대괴구를 끌고 차츰차츰 최후로의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거대한 불길에 스러져갔고, 더 이상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소년은 일어섭니다. 도저히 어쩔 수 없기에, 아버지의 질문에 답은 못 찾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소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행복은 불행 없이 얻을 수 없는가? 시대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없는가?' 다이사쿠는 그 답을 모르지만, 세계의 비극에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이언트 로보와 함께 펀치를 날립니다. '자이언트 로보: 지구가 정지하는 날'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후 아래에서는 결정적인 네타들이 가득합니다. 애니를 안 보신 분이라면 절대! 보지 말 것을 권해드립니다)




(애니메이션을 감독한 이마가와 감독은 혼과 열혈을 그려낼줄 아는 감독이다. 그래서 감동도 1.5배에서 2.5배가 된다. 손이 불타고 있는 도몬 캇슈를 창조해낸 인물이기도 하니 오죽할까. '자이언트 로보: 지구 최후의 날'에서도 열혈 넘치는 캐릭터들을 다수 창조해냈다) 


혼을 불어넣은 걸작

 

전 흔히 명작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흥행으로도 매우 성공하고 이후의 애니메이션 업계 판도에 영향을 준 '대작' 애니. 또 다른 하나는 업계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흥행도 그럭저럭이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걸작' 애니. 로봇물의 방향을 바꾼 건담이나, 90년대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한 에반게리온, 또는 모에 코드를 제대로 작렬한 하루히 같은 작품은 전자에 속할 겁니다. 지금 소개하는 '자이언트 로보: 지구를 정지하는 날'은 단연 후자에 속합니다. 큰 흥행을 거두지 못했고, 업계에 영향은커녕 후속작도 만들어지지 못했지만(원작만 같은 'GR 자이언트 로보'는 제외) 이 애니가 엄청난 명작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요코하마 미츠테루가 창조해낸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총집합, 이마가와 야스히로 감독의 열혈 넘치는 연출과 감동과 충격, 전율을 일으키는 스토리 플롯,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엄청난 퀄리티의 작화와 극에 어울리는 웅장한 OST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초호화 스텝진을 구성하고 OST 녹음은 폴란드 국립 바르샤바 오케스트라단에게 맡기는 등 문자 그대로 돈 지랄을 해댄 끝에, 제작비 문제로 7편의 OVA를 제작하는 데 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돈을 땜빵하기 위해 유일하게 팔릴 만한 캐릭터인 긴레이를 주역으로 한 세 편의 외전을 제작하기까지 했고요. 이마가와 감독은 '진겟타, 세계 최후의 날'의 감독도 맡았지만 단 3화만에 너무 많은 예산을 썼다고 해서 전격 교체를 당하기까지 했으니 돈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나봅니다. 어쨌든 다행히(제작사에게는 다행이 아니겠지만) 자이언트 로보 때는 감독을 계속 맡을 수 있었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애니메이션을 완성시켰습니다.

 


('자이언트 로보'에는 여성 캐릭터가 일단은 두 명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상 긴레이 한 명이라고 봐도 좋다. 아니 한 명이다.... '자이언트 로보'는 '팔릴 만한' 미소녀, 혹은 미형 캐릭터가 필수가 된 현재의 애니메이션 업계와는 상당히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그래도 긴레이의 인기는 상당해서 긴레이를 주역으로 한 '맨발의 긴레이', '철완 긴레이' '푸른 눈의 긴레이' 세 편의 외전이 만들어졌다. 후속작이 안 나오는 것은 더 이상 긴레이가 등장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뜨거운 아저씨들의 활약

'자이언트 로보: 지구가 정지하는 날'은 만화 삼국지로 유명한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마가와 감독은 '원작 파괴자'라는 명성답게 기본 설정 외에 모든 것을 갈아엎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 좋습니다. 원작에서 살아남은 부분은 자이언트 로보라는 로봇의 이름, 다이사쿠라는 소년이 주인공, 시계형 음성 콘트롤러로 조종, 국제 경찰 기구와 BF 단의 대립을 배경으로 함, 이 정도뿐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수호지, 삼국지, 철인 28호, 바벨 2세 등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리낌 없이 집어넣고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제갈 공명이 적 세력 BF 단의 책사로 등장하는 등 캐릭터들의 이런 변화에 잔재미를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자이언트 로보는 비록 로봇물이기는 하지만 이 애니의 중점은 로봇이 아니라 캐릭터에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사실 로봇물이 아니라 무협지 같은 호걸물, 협객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상최강의 로봇, 자이언트 로보'라고 소개되지만 솔직히 십걸집과 구대천왕 정도면 로보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분명 이길 겁니다. 신행태보 대종, 흑선풍 철우(이규), 조용한 추죠 등 국제경찰기구의 엑스퍼트들과 충격의 알베르트를 비롯한 BF 단의 십걸집들의 위압감은 굉장합니다. 이 인간을 초월한 인간들의 대결이 로보의 활약보다 사실 더 두근거리고 박진감 넘칩니다(물론 로보의 듬직한 얼굴도 멋지지만요). 제가 그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대종 형님입니다. 제가 '아니키(형님)'라는 일본어를 알게 된 것도 여기서였고요. 물론 최근에는 그렌라간의 카미나가 아니키의 대명사겠지만 저는 대종 형님이 더 좋습니다. 껄렁껄렁해 보이지만 그릇이 크고, 굳은 의지와 배려심을 두루 갖춘 진정한 호걸이지요.



(알베르트와의 대결에서 가슴에 구멍이 뚤렸지만 대종은 '아니, 내가 이겼다!'라고 외친다. 필생의 라이벌과의 승부보다 다른 사람들과 자이언트 로보의 도피 시간을 벌기 위해 전자 네트 와이어를 지키는 것을 우선한 모습은 깊은 감명을 준다. 그 모습에 당황하고 대종의 죽음을 누구보다 받아들일 수 없어 하는 알베르트의 모습도 인상적. 정말로 이것이말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이런 실패는 얼마든지 있어. 대단한 일이 아냐.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뒤다'라는 대사도 좋아한다.)


 

그 외에도 단순 무식하지만 우직하고 순박한 철우, 호탕한 여걸로 등장하는 청면수 양지, 구대천왕의 하나이자 생명을 건 금기의 빅뱅 펀치를 사용하는 추죠 장관, 죽을 수 없는 남자 무라사메, 그리고 유일하게 매력적인 히로인인 긴레이에 이르기까지 멋진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게다가 악역인 BF 단의 십걸집들도 모두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충격의 알베르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간지폭풍이라서 아군들보다 더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인 다이사쿠는 역시 애라서 철이 없고 이 아저씨들의 매력에는 상대가 안 되지요.


아쉬운 점은 '자이언트 로보: 지구가 정지하는 날'이 기본적으로 '미완성' 작품이라는 데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자이언트 로보'는 총 26화 계획의 애니메이션이었으며 '지구가 정지하는 날'은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 앞뒤로 다른 에피소드들이 제작될 계획이었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영영 만들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양산박의 구대천왕도 다 등장하지 않고, 십걸집들도 제대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죠. 누구나 작품 마지막에 바벨 2세의 모습을 한 빅 파이어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서 전율했을 테지만(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전율만 남겨놓고 후속편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죠. GR 계획은 뭐고 바벨의 농성은 뭔지 팬들은 상상의 나래만 펼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마도 앞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행복은 불행 없이 얻을 수 없는가? 시대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없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포함해, '자이언트 로보'가 팬들을 사로잡은 것은 이 질문의 무거움일 겁니다. 다이사쿠의 아버지가 다이사쿠에게 자이언트 로보를 건네며 던진 이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테마로 기능합니다.

 
'지구가 정지하는 날'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 시즈마 드라이브라는 완전 무공해 재생 에너지가 개발된 지구입니다. 이 놀라운 에너지의 등장으로 결함이 있는 화석 연료와 원자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인류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지구정복을 노리는 BF 단, 그리고 BF 단의 힘을 빌어 숙원을 이루려는 겐야에 의해 수수께끼의 시즈마 드라이브 정지 사건이 일어나고 모든 것을 시즈마 드라이브에 의지하고 있던 지구는 '정지'합니다. 이 지구 정지 작전에 맞서 자이언트 로보와 국제경찰기구가 싸우며, 시즈마 드라이브에 감춰진 진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진실을 만나는 것이 이 OVA의 주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그래서 크게 두 번 반전을 겪습니다. 작품 중반의 시즈마 드라이브에 얽힌 추악한 진실, 그리고 결말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율과 감동의 진실.


작품 초반, 시즈마 드라이브의 개발자 중 하나인 프랑켄 폰 포그러 박사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풍기는 매드 사이언티스로 등장합니다. 그는 10년 전 무리한 실험으로 한 나라를 소멸시켜버리고 지구 전역의 동력 기관을 정지시킨 '바슈탈의 참극'을 일으킨 인물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1화에서의 연출은 정말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주는 듯 광기에 가득찬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주변 인물의 석연치 않은 태도와, 포그러 박사의 아들임이 분명한 겐야의 복수심은 그 사실에 뭔가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는 의혹을 심어주죠.


이야기가 진행되며 작품 중반에 포그러 박사와 바슈탈 참극에 대한 진실이 밝혀집니다. 바슈탈의 참극이 포그러 박사가 아닌 다른 개발자들이 성급한 실험을 한 결과로 일어난 것이며, 포그러 박사는 최후까지 연구를 계속했다는 진실이 말이죠. 그럼에도 포그러 박사는 참극을 일으킨 '파괴자'로, 이후 시즈마 드라이드를 완성한 다른 박사들은 인류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은 겁니다. 악역인 겐야의 정체는 포그러 박사의 아들인 엠마뉴엘 폰 포그러로, 그는 아버지의 희생을 딛고 완성한 시즈마 드라이브에 의해 번영을 누리면서도, 아버지를 세계의 파괴자로 비난하고 있는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지요. 정말로 바슈탈의 참극을 일으킨 다른 과학자들은 오히려 인류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끝까지 과학자로서 노력하다 죽은 자신의 아버지는 모든 죄를 덮어쓰고 있는 현실은 충분히 한 사람을 비뚤어지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시즈마 드라이브가 인류에게 아무리 놀라운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한낱 증오스러운 물건이었겠죠. 게다가 아버지의 최후의 유언이 "시즈마를 세워라"였으니 엠마뉴엘로서는 지구상의 시즈마 드라이브를 없애버리는 것이 삶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는 악마라고 비난받을지라도 그로서는 정당한 복수이며, 추악한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단죄인 셈이죠.


그리나 작품의 마지막, 처음에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두 번째는 복수심에 불타는 과학자로 묘사되던 프랑켄 폰 포그러 박사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고, 이야기의 끝에 새로운 시즈마 드라이브의 빛이 지구를 감싸면서 지구는 다시 아름다운 저녁을 되찾습니다. 포그러 박사와 시즈마 드라이브의 진정한 진실이 밝혀지면서 슬픈 비극을 덮은 채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결말이지만 파국에서 구원으로의 전환은 아주 극적으로 그려집니다.


(샘플이 세 개가 모이고 그 안에 암호화어 있던 포그러 박사의 메시지가 흘러나오면서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 이때의 포그러 박사는 정말로 위대한 과학자. 감동의 눈물을 안겨준다. 지구를 영원한 암흑에 잠기게 할 줄로 알았던 샘플의 정체는 사실 시즈마 드라이브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빅파이어는 이것을 알고 있던 걸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자이언트 로보: 지구가 정지하는 날'은 사실 굉장히 어두운 작품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극은 점차 어두워지고 많은 호걸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선악의 구도는 분명하지 않으며 무대가 되는 사건도 실상 불행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대종, 양지, 긴레이뿐만 아니라 포그러 박사와 사건을 일으킨 엠마뉴엘조차도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자입니다. 다이사쿠의 아버지는 다이사쿠에게 자이언트 로보를 주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인 '행복은 불행 없이 얻을 수 없는가? 시대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다이사쿠는 끝까지 고민하지만 답을 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작품 내에서도 등장인물들은 행복을 위한 불행을 겪고,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희생을 합니다. 그들의 불행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구는 정말로 완전히 정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행복은 불행 없이 얻을 수 없으며, 시대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없는 걸까요? 이 무거운 질문은 다이사쿠에게만이 아니라, 작품 속의, 그리고 작품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가요?


희생 위에 쌓아올린 현재

저희 어머니는 세 살 때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위로는 네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외할머니의 뱃속에는 동생이 있었지요. 그때부터 외할머니는 홀몸으로 여섯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외가집은 1950년대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난한 농가였고 의지할 친척들도 없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농사일과 농작물을 읍내에 나가 파는 행상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는 결코 알 수 없을 고난이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외할머니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모두 잘 길렀고 모두 다 결혼도 시켜 한 일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태어난 것이고, 아직은 어린 제 외가 쪽 조카(외할머니에게는 증손자)들도 태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기억을 할 만한 나이 때에 외할머니는 이미 치매에 걸려 계셨고, 제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셔서 큰 기억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주로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들이죠. 어머니는 언제나 외할머니가 자식들 기르느냐고 고생만 하시다 이제 다 길러놓고 조금 편하게 지나게 될 수 있게 되자 병이 드셔 돌아가시게 된 일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게 고생만 하다 가시게 된 일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비단 저희 집안의 사연만은 아닐 겁니다. 흔히 말하듯 가난하고 힘든 시절 우리 조부모님, 그리고 부모님들은 온갖 고생을 하며, 많은 희생을 하며 자식들을 길렀고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한 그분들은 호사 한 번 누리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험난한 '시대를 넘기 위해', 자식들에게 '행복을 전해주기 위해' 스스로 불행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뜬금없이 가족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희생을 거쳐 시대를 넘어왔으며, 불행을 통해 행복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희생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가족사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오늘날 이나마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도 무수한 피가 흘렀습니다. 학생들이 총탄에 스러져갔던 4.19, 학살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5.18, 70~80년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던 수많은 열사들. 더 멀리 가보자면 3.1 운동을 위시한 선조들의 독립 운동 역시 우리의 삶을 만든 중요한 일들이었을 겁니다. 필시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은 그런 한 사람 한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더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삽니다. 그렇지만 정작 희생을 한 그 당사자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영역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외치듯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그간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으며 6.25 직후 세계 최빈국에서 현재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한국 노동운동사에는 경제 성장과 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착취와 탄압의 역사가 선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만 여명의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으로 '수출'했으며 그들이 보내온 외화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일협정으로 정신대 및 강제 징용에 대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원조를 받았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여러 이익을 얻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경제사에도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을 한, 혹은 당한 사람들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가장 큰 혜택은 그 희생과는 상관없는, 혹은 희생을 강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해보면 씁쓸해집니다.

아마도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럴 겁니다. 어떤 일들에서든, 또는 어떤 사건에서든 책임과 희생은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더 많은 희생을 합니다. 역사에 희생은 불가피해 보이고, 그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문명은 발전합니다.



불행 없는 행복, 희생이 없는 시대 

'자이언트 로보'의 세계 역시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대종은 전자 네트 와이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합니다. 양지 역시 적과 자폭하죠. 철우는 다이사쿠를 지키기 위해 총탄을 뒤집어씁니다. 무라사메는 불사신의 몸을 버려가며 긴레이의 길을 열어줍니다. 추죠 장관도 생명과 바꿔 대괴구를 멈추려 합니다. 그리고 긴레이는 목숨을 건 거대 텔레포트를 실행하고, 결국 은 방울(銀鈴)만 남긴 채 영원히 사라져버립니다. 다이사쿠는 아버지의 유언을 되새겨 불행 없이 행복을 얻고, 희생 없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그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자신도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불행 없이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인지, 희생 없이 시대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이사쿠는 그런 세상 앞에 주저앉아버립니다.

(소년이 일어서고, 로보도 함께 일어선다. 멋진 어른들은 소년이 가는 길을 열어준다. 어떻게 보면 '자이언트 로보'는 소년의 성장기이며, 소년이 비뚤어지거나 상처받지 않고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는 멋진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반면 작중 다이사쿠와 오버랩되는 겐야는 그런 어른들의 도움이 없었으며 그 결과 비뚤어졌다.)  

그렇지만, 다이사쿠는 다시 일어섭니다. 답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다이사쿠는 싸우기를 선택합니다. 그 길이 긴레이를 희생시키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더 이상 남아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이사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래서 다이사쿠는 눈물을 흘리면서 로보와 함께 주먹을 휘두릅니다. 불행이, 희생이 무조건 싫다는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그것이 불가피한 길이라면 괴로워도 가야만 한다는 '어른'의 마음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이언트 로보'에서의 희생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을 뿐 결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대종도, 양지도, 철우도, 추죠 장관도, 무라사메도, 긴레이도, 모두 자기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포그러 박사 역시도 진정한 아름다운 저녁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언제나 '자신'의 희생으로 인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후손들을 위해 치룬 희생 역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행복은 불행 없이 얻을 수 없는가? 시대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없는가?' 저 역시 다이사쿠처럼 답을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다이사쿠처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대종처럼, 그리고 긴레이처럼,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때로 민주주의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 그 정치적 자유로 열사들을 폄훼하기에 바쁜, 또 노동자 투쟁의 결과물을 누리면서 노조를 비난하는 그런 '무임승차자'들을 보면 화도 납니다.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들, 정신대 할머니들,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과거 노동자와 농민들의 희생으로 형성된 거대 기업의 현재를 보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 희생이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런 희생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겐야처럼 격분하여 '누구 덕분인 줄 알고!'라고 외치고 싶어지고, 때로 그 부정의한 모습에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그런 희생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 아니 바로 그런 귀중한 희생으로 만들어졌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포그러 박사가 자신이 모든 죄를 덮어 쓰고 비난당했음에도 시즈마 드라이브가 가져다준 아름다운 밤에 만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피를 자양분으로 진행되어온 그러한 역사 앞에 미약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적어도 타인을 희생시키지는 않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고 희생으로 이루어진 '추악한 과거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희생 없이 시대를 극복해오지 못한 역사였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앞으로의 세대는 희생 없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기 위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저는 '자이언트 로보'에서 스러져간 호걸들의 마음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펀치를 날리는 다이사쿠의 마음이라고, 자기자신을 바쳐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의 뜻이었다고,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모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부수고, 불행 없이 행복을 얻고, 희생 없이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지금은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 그리고 또 다음 세대에는 가능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들의 빅파이어를 위하여!' 제발 후속작 좀....)
  
  
    

by sonofspace | 2010/01/05 15:45 | 트랙백(1) | 덧글(12)

명품 도시의 뒤편.

지하철 역 출입구 근처에는 보통 떡볶이, 튀김, 오뎅, 순대 등을 파는 작은 노점상들이 몇 개씩 들어서 있습니다. 대체로 사십줄, 오십줄쯤 되는 아주머니들이 역 주변을 오가는 손님들에게 몇천 원씩의 먹을 거리들을 팔고 계십니다. 진지하게 위생 상태를 상상해보면 다소 깨끗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갈 때마다 눈과 코를 사로잡고 침을 꼴깍 삼키게 합니다. 저도 출퇴근 길에 지하철 역을 지나게 되는데 시간이 늦어 저녁 챙겨 먹기 귀찮을 때는 떡볶이와 튀김을 사가 때우기도 하고 요즘같이 추울 때는 따끈한 오뎅 한두 꼬치로 몸을 녹이고 집으로 가곤 합니다.



그런데 어제, 출근길에 지하철 역 앞의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말 사이에 공사를 시작한 것인지 노점들이 자리하고 있던 길가에 깔끔한 벽돌로 예쁘게 꾸민 화단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역 주변을 아름답게 정돈해서 주민들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려는 구청의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일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역 주변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꾸미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그렇지만 전 '잘 됐네'라는 생각보다는 '여기 있던 노점 아주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걱정이 더 앞섰습니다. 그러고 보면 몇 달 전부터인가 지하철 역 정리 사업을 알리는 안내 문구가 있었던 것 같고. 노점상 연합 단체에서도 몇 달간 깃발을 내걸고 그 사업에 반대하고 있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화단 공사가 끝나고 나면 난잡했던 역 주변이 꽃과 나무로 공원처럼 꾸며질 테고 주민들은 기분 좋게 주변을 지나다닐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공사가 끝나도 노점상들은 다시 역 앞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한 주민들은 쾌적한 환경을 얻을 겁니다. 떡볶이야, 분식점은 많으니까요. 노점 아주머니들은 작은 노점을 끌고 어딘가로 옮겨가야 할 것입니다. 어디로?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청계천 복원 공사가 끝나자 많은 서울 시민들이 도심에 멋진 공원이 생겼다고 좋아하고 칭찬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자신의 대표적인 치적이라고 자랑을 하고요. 그런데 청계천 일대의 상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청계천 상인들을 위해 탄생한 '가든 파이브'는 잘 알려진 대로 대규모 '유령 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도 당초 약속과는 거리가 먼 비싼 분양가 때문에 실제로 입주한 상인들은 20퍼센트 남짓이었습니다(입주 안 하길 잘한 셈이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청계천 덕분에 도심에서 산책과 휴식을 즐길 수 있지만, 청계천의 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습니다. 혜택받는 규모를 따지자면 단연 천만의 서울 시민이 많을 테지만, 이런 다수결에 따른 결과를 가지고 이 일을 '잘했다'라고 칭찬해야 할까요?




올해 지하철에서 '잡상인들에게는 지갑을 열지 말고 핸드폰을 열어 신고하라'는 지하철공사의 포스터를 보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지하철 차량을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물품을 타는 사람들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직업도, 장사를 할 만한 밑천도 없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궁여지책일 겁니다. 때로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거슬리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아니 신고라니요? 분명 지하철 내에서 허가 없이 물건을 파는 것은 '불법'이겠지만 시민들에게 냉혹해지라고 종용하는 그 포스터가 저는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길가의 노점들을 단속하고, 지하철의 떠돌이 상인들을 잡아내는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흡사 조선 후기에 있었다는 금난전권이 생각나지 뭡니까. 그때는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와 장사를 했더니 터줏대감인 시전 상인들이 막았다고 하지요. 요즘도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장사를 하지만 '명품 도시'를 만드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단속을 합니다. 그렇게 폼 나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명품 도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올림픽을 앞두고 판자촌을 강제로 철거했다는 전 모씨의 그림자가 얼핏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두려운 것은 그런 명품 도시, 또는 시민들의 편의라는 것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도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지나다니는 역 주변에 불결한 노점상이 없어지고 멋진 공원이 생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저 반기기만 하지 않을까? 지하철의 떠돌이 상인들에 지갑 대신 핸드폰을 여는 일이 일상이 되지는 않을까? 시민 다수의 편의에 누군가의 생존권이 박탈되는 일이, 그리고 그 일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두렵습니다. 다수의 세입자들을 몰아낼 뉴타운 사업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역 상권을 파괴할 대형 쇼핑몰을 멋진 랜드마크라고 환영하는 모습들을 보면, 시민에게 불편을 주고 국가 '브랜드'를 낮춘다며 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욕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두려움이 그리 근거가 없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지저분하고 보기 싫은 것들은 밀어버리고 삐까번쩍하고 간지 나는 것들로 장식하는 명품 도시의 모습이 더 못나고 추해 보입니다. 누군가들을 배제하고 희생시켜 쾌적한 삶을 추구하는 이 사회의 모습이 독사처럼 비정해 보입니다. 하물며 나 자신도 그렇게 배제될 수 있는 다음에야...

by sonofspace | 2009/12/15 23:53 | 트랙백 | 덧글(1)

노조의 패배가 아닌 노조의 양보.

교섭을 하자고 시작한 파업이었다. 철도공사가 노조와의 협의에서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해지해서 시작된 파업이었다. 단체협약을 해지했다는 것은 노조를 파트너로 보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것이 말로는 '선진적인 노사관계'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행태다. 노동자는 군말없이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짤려야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선진화'의 실체다.


노조는 교섭을 하면 파업을 풀겠다고 했고, 공사는 파업을 풀어야 교섭을 하겠다고 했다. 애초에 교섭을 철도공사가 거부하니까 시작한 파업이다. 그래놓고 파업을 먼저 풀어야 교섭을 하겠다? 이게 대화를 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 귀가 막힌 것은 누구인가, 막무가내로 자기주장만 하는 것은 누구인가?


8일간의 파업. 이 역시 철도 역사상 최장 기간의 파업이란다. 시민의 불편, 중소기업의 어려움, 수출에 차질, 보수언론은 익숙한 레퍼토리를 읊어댔다. 대통령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점잖게 훈계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파업을 유발한 공사 측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째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정당하게 파업을 한 노조를 비난하는가.


어쨌든 파업은 끝났다. 보수지들은 '노조의 항복'이라며 신이 났다. 물론 노조는 별 다른 성과 없이 파업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여전히 1만 명가량이 파업 대오에 동참하고 있었고, 여론도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우호적인 편이어서(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에서) 분명 몇 일은 더 파업을 이어갈 동력은 있었다. 나는 오히려 경험 없는 대체 인력 투입으로 혹시라도 일어날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한 노조의 양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사고가 난다면 비난은 미숙한 대체 인력을 투입한 정부가 아닌 노조에게 가해질 테고. 


물론 이건 나 개인의 지극히 편견에 치우친 해석이다. 현실적으로는 늘어나는 이탈자와 파업대오의 심리적 피로, 보이지 않는 전망, 정부의 강경한 태도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극한 대립 상황에서 노조가 한 발 먼저 물러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사측과 정부는 교섭을 할 생각은커녕 처벌만을 내세우고 있다. 가는 게 있으며 오는 게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기대조차도 배신한다. 정말로 자신들이 싸움에서 이긴 승자인양, 온갖 오만을 부리며, 상대를 핍박한다. 이것이 화합과 대화를 말하는 자들의 행태이다. 


누가 더 합리적인가? 누가 더 시민의 안전을 생각하는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필수 열차 운행 인력을 배치하고 최대한 정당하게 파업을 진행한 노조와, 노조원과 그 가족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고 미숙한 대체 인력을 배치해 열차 운행을 강행하는 정부와 공사, 누가 더 올바른가?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철도노조 위원장의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철도의 장기간 파업에도 불구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묵묵히 지켜봐주신 국민여러분께 철도노동자의 충심으로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또한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을 제 일처럼 함께 걱정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노동 형제들, 양심적인 시민사회단체와 언론 및 정치권, 그리고 이름 모를 네티즌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우리는 철도 현장으로 복귀하려 합니다.

철도 사상 초유의 단협해지로 촉발된 이번 철도 파업기간 내내 우리 철도노동자는 항상 가슴을 조이며 생활했습니다. 그것은 파업에 대한 철도공사와 정부의 무차별적인 협박과 탄압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리하게 투입된 대체인력으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서민들의 생활이 더 힘들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도 잘 아시다시피 철도노동자의 이번 파업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철도공사와 정부는 최소한 헌법과 노동관계법에 보장된 합법적인 쟁의에 대해 고소고발과 체포영장 발부, 압수수색, 징계 협박 등으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습니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인 파업 파괴를 진두지휘하고 나섰으며 경제살리기란 미명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합법’을 ‘불법’으로 둔갑시키고 탄압의 빌미를 만들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민 불편 해소를 위해 철도노조는 조건 없는 대화와 교섭을 요구했지만 정부와 철도공사는 국민을 볼모로 공기업 노동자 죽이기에만 골몰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소통은 없었고 공권력을 동원해 법을 유린하고 탄압만 했습니다. 노사자치, 자율교섭의 대원칙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피로와 피곤을 털어내고 부당하고 불법적인 정부와 철도공사에 당당히 맞서는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철도공사가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대화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대화를 요구하지 대화를 구걸하고 있지 않습니다. 철도공사는 정부의 치맛자락에 숨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교섭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파업 중단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철도공사가 여전히 현재와 같은 불법과 몰상식을 되풀이 한다면 조직을 정비하고 힘을 모아 더 당당한 모습으로 투쟁으로 맞설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철도노동자들은 이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철도의 안전한 운행을 위해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들이 값싸고 편리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철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철도노동자가 앞장서서 싸워나갈 것입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철도산업에서 녹색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도록 신규인력 충원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현 노동에 대한 혐오증에 갖힌 정부에 맞서 노동의 존엄성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철도노조의 합법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부당노동행위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묻도록 할 것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를 비웃은 이들에게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시 한번 불편을 감수하며 철도노동자의 투쟁을 지켜봐 주신 국민여러분께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2009. 12. 3.

전국철도노동조합 위원장 김기태

by sonofspace | 2009/12/04 14:05 | 트랙백 | 덧글(34)

파업이 실패하면 당신에게 돌아오는 이익.

0.

철도노조의 파업을 보며 예전에 잠깐 정리해봤던 최근 몇 년간의 주요 파업에 대한 글을 올려본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2000년대 노동자들의 투쟁은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많았다. 게다가 승리는 작고 일시적이었으며, 패배는 크고 지속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패배와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도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으로서 노조의 파업을 비난하지만, 그 행위는 곧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허물뜨리는 일이다. 10년간의 역사는 그 사실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1.

2004년 7월에 정유업계 최초로 정유사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GS 칼텍스 노조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발전기금 조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 △임금 10.5% 인상 △교대제 전환 등의 요구를 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여기서 노조의 핵심 사안은 환경 오염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지역에 매출액의 0.01퍼센트를 출연할 것과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단계적인 정규직화, 주 40시간 근무제와 신규인력충원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중재에 나선 중앙노동위원회는 4퍼센트의 임금 인상은 승인하되 비정규직 문제와 지역사회 발전기금은 제외한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노조는 거부했고 파업을 지속했다. 회사가 일부 고액 연봉자들의 연봉을 공개하면서, 언론은 연봉 7천만 원의 귀족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며 매도했고, 대다수의 여론 역시 적대적으로 변했다. 노조가 주장한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지역사회 발전기금의 문제는 깡그리 묻히고 귀족 노조의 떼쓰기 파업으로 낙인 찍혔다. 결국 노조는 백기를 들었고 해고 23명, 징계 647명, 구속 6명, 31억의 손배가압류라는 결과를 남겼으며,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반성문까지 써야 했다. 노조는 철저히 파괴됐고 무분규 선언을 했으며, 최근에는 노사합의로 파업 금지를 결의했다. 패배도 이런 패배가 없다.


2.

만만찮은 강성노조일 지하철공사 노조 역시 숱한 투쟁에서 패배해왔다. 99년에 당시 몰아닥친 공기업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이 있었다. 이른바 대규모의 인원감축을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신호탄이었다. 6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지하철을 멈추고 명동성당과 서울대 등에서 모여 농성을 했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에는 시민의 발을 볼모로 잡은 파업이라며 노조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시민들은 노조를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노조는 8일 만에 파업을 접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역시 징계와 구속 등 노조 파괴 공작이 있었고, 급기야 그해 노사화합과 선진적인 노사관계를 표방하는 배일도가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그는 1600여 명을 해고한다. 또 정년은 3년이 줄고, 학자금 지원이 폐지되고, 4조 3교대에서 3조 2교대로 노동 조건은 악화되었다. 2003년에 운행시간이 1시간 늘 때도 인원충원은 없었다. 심지어 1997년 이후 서울지하철공사는 노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신규인력 채용도 하지 않았고 2005년에 147명을 신규채용하는 데 그쳤다. 1600여 명을 해고하고 147명을 고용했다. 그러고도 실업 문제는 밥그릇을 챙기는 기득권 노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004년의 지하철 파업은 더 비참했다. 지하철노조는 임금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시행과 그에 따른 3천여 명의 신규채용을 중심 요구조건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이번에 정부는 더 잘 준비하고 있었다. 대체인력을 마련해 지하철 운행에 차질을 주지 않았고, 귀족 노조, 국민 혈세, 시민 볼모 등의 명목으로 노조를 공격했다. 노조는 3일 만에 파업을 접었고, 배 부른 줄 모르는 철밥통이라는 비난만을 얻었다. 그러나 3천 명의 신규채용이 이루어졌다면 3천 명이 새로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3.

노조의 고달픈 투쟁의 역사는 너무 기니, 마지막으로 화물연대의 사례를 보자. 화물연대가 세상을 처음 놀라게 한 것은 2003년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이들의 최우선 요구 조건은 화물차주들을 노동자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지금도 이들은 화물차를 소유하고 있는 차주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원청에 매여 일을 하고 있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그래서 이들은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밖에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어먹는 불법다단계알선 폐지와 표준요율제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어느 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차마 화물노동자들에게는 귀족노조라고 할 수 없어서인지 이번에는 폭력성과 불법성을 부각시키고 국가의 물류를 마비시켜 '수출'에 지장을 준다며 나라를 망치는 역적으로 취급했다. 2003년 이후에도 두세 차례 큰 파업이 있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올해 박종태 열사의 죽음에도 노동자 인정이 아니라 계약 해지 철회만을 얻어냈을 뿐이다. 이들은 지금도 노동자가 아니다. 그토록 열심히 노동하고 있음에도.



4.

누구나 비정규직이 되기 싫어한다. 그러나 어째서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눈을 감는가? 아니 심지어 눈을 부라리기까지 하는가? 철도노조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달리 말하면 신규 인원을 확충하자는 이야기이다. 실업 해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주장이 아닌가. 당신이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것처럼 누구든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당신이나 혹은 당신의 형제자매, 자녀, 친지들이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닌가?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것이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당신의 이익을 생각하라. 누군가의 노동운동의 패배는 곧 당신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당신의 노동자인 한,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87년의 강성한 노동자 대투쟁으로 실질임금의 상승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괄목할 만한 향상이 있었다. 97년 IMF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노동유연성의 도입으로 벌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청년 실업, 노동 시간 증가, 비정규직 증가, 또 그에 따른 정규직의 불안정화, 노동자들끼리의 생존 경쟁,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적 불안정이었다.     


노동운동의 패배가 당신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다오.
노동운동의 승리가 당신에게 어떤 손해를 가져다주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다오.

당신이 누군가의 녹을 먹고 사는 노동자라면, 부디 그 입장에서 말이다.

by sonofspace | 2009/12/01 21:33 | 트랙백(7) | 핑백(4) | 덧글(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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