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2007년의 어느날과 오늘.

2007년 3월말쯤에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수 년간 끌어온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동안 협상 과정에 관심을 가져오고 몇 번의 반대 행동에도 참여했던 나는 그날도 안국역 근처 어디선가 있던 반대 집회에 갔다. 몇백 명 정도 모인 그 집회에 별다른 힘은 없었다. 청와대 쪽으로 가는 길은 이미 경찰로 봉쇄됐고, 사람들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익숙한 집회 프로그램을 반복했다. 발언, 구호, 율동, 민중가요,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고 새벽녘에 사람들은 흩어졌다. 특별히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토록 중대한 협상을, 그렇게 졸속으로, 수많은 반대를 무시하고 진행한 정부에 대한 불만에, 한미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지긋지긋한 선전과 미화에 화가 나서, 그 마지막 풍경을 지켜보고자 나갔을 뿐이다. 그렇게 타결된 이후에도 부족함을 느낀 미국측의 요구에 몇 번의 추가 협상을 했고(노무현 때도, 이명박 때도 했다), 한국 국회의 비준만을 남겨둔 오늘에 이르렀다.


2007년의 그때는 서럽고 외로웠다. 한미 FTA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집권 내내 부딪혀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한미 FTA에 한해서는 한목소리였다. 여당 내 천정배 정도의 의원만이 반대 목소리를 냈다. 노무현 죽이기에 열과 성을 다하던 조중동도 한미 FTA에는 칭송을 마다 않았다. 미국에게 너무 많은 걸 양보한 협상이며 투자자국가제소제가 주권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몇 년간 외쳤지만 정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중앙일간지를 도배한 FTA 홍보 광고에 위험성을 지적한 내용들은 괴담 취급당했다.'그건 다 오해'라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가카가 아니라, 노무현 전대통령이 말이다. 한줌도 안 되는 진보세력만이 한미 FTA 반대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냥 깃발만 나부꼈다.


지금,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아니고 5년도 안 지났지만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당시 참여정부 인사들 모두가 앞장서 한미 FTA는 굴욕적 협상이고 투자자국가제소제는 독소 조항이라고 외치는 데 나는 좀 어안이 벙벙하다. 그때는 '우리 노 대통령이 그럴 리 없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명박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이야기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좋아해야 할 일일진대, 가슴속 한켠이 불편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변신' 과정을 해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정말 진정으로 변했는지(즉 ISD가 정말 독소조항이고, 한미 FTA가 자본에 지나친 자유를 주는 나쁜 조약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황상 잠시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신뢰가 싹트지 않고 의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와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냐고 말들 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셍각하자면 중요한 것은 한미 FTA의 국회 비준을 막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선 보탤 수 있는 힘은 다 보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일 관계를 놓고 흔히 말하듯 과거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미래로 가기 위함이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명박의 FTA와 노무현의 FTA는 큰 맥락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활동의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자본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조약이며, 한국의 경제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선진적인 금융경제 시스템'으로, 개조하는 첫 발이다.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미국에 '선물'을 더 많이 줬다고 해서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명박의 FTA와 노무현의 FTA가 다르다는 전제로 반대에 나서는 것은 논리에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당장 민주당의 FTA 반대가 자가당착이라는 보수언론의 공세에 대응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이유로 한미 FTA를 반대하려면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문제를 인정해야만 한다. 반성 없이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해서 이들은 정말 한미 FTA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이명박 반대를 위해 한미 FTA를 이용하는 것일까? 행동하는 양상으로 보건대 많은 이들은 후자 쪽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한미 FTA를 단지 이명박을 깔 '소스'로만 활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그 목적이 다하면 한미 FTA 자체는 어찌 돼도 좋다고 여기리라고 예상하기에, 한미 FTA에 대한 비등한 반대 여론이 기쁘지만은 않다.

재보궐 투표 단상

안철수 또는 박원순이 사람들을 투표장을 많이 불러 모았는가?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48.5퍼센트였다. 높은 수치이지만 지난 4월 열린 분당을 재보선보다 1퍼센트 낮다. 물론 안철수 같은 다수의 대중들이 아는 메이저급 인사가 선거에 대한 관심을 올리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학규가 출동한 분당을 재보궐에서 달성한 수치를 넘지는 않았다. 안철수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열망이 투표율을 올렸다는 분석은 섣부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민들의 여야를 막론한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은 분명한 신호로 나타나고 있다.



SNS는 대중의 정치 참여에 영향을 주었는가? 그런 것으로 보인다. SNS에서 유통되는 정보와 투표 독려 분위기는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앞선 두 번의 재보궐 선거는 10년 동안 벌어진 재보궐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이 수치는 단순히 SNS의 영향력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강렬한 반감에서 비롯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SNS는 정확히 얼마만큼의 영향을 줬는가? SNS가 없었다면 투표율은 얼마나 됐을까, 혹은 각 후보의 득표는 어떻게 됐을까 이런 점들이 파악이 돼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SNS의 위력, 선거혁명이라고 대충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SNS가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심층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저널리즘일 것이다. SNS에서 얻은 정보로 지지후보를 결정했는지, 혹은 그 때문에 투표를 하게 됐는지 등. 역시 중요한 것은 실증 증거다.


19세

20대 전반

20대 후반

30대 전반

30대 후반

40대

50대

60세 이상

평균

10 지선

47.4

45.8

37.1

41.9

50.0

55.0

64.1

69.3

54.5

08 국선

33.2

32.9

24.2

31.0

39.4

47.9

60.3

65.5

46.1

07 대선

54.2

51.1

42.9

51.3

58.5

66.3

76.6

76.3

63.0

06 지선

37.9

28.3

29.6

37.0

45.6

55.4

68.2

70.9

51.6

04 국선

-

46.0

43.3

53.2

59.8

66.0

74.8

71.5

60.6

02 대선

-

46.0

43.3

53.2

59.8

66.0

74.8

71.5

70.8

02 지선

36.3

27.0

34.5

44.8

56.2

70.0

72.5

48.9

00 국선

39.9

34.2

45.1

56.5

66.8

77.6

75.2

57.2


구할 수 있는 자료로 지난 10년간 선거율 추이를 정리해봤다.

지방선거만 놓고 봤을 때 40대 미만은 투표율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40대 이상은 소폭 감소했다. 06년도 지방선거 역시 02년도 지방선거보다 투표율이 상승했지만, 젊은 층의 투표율 상승폭은 10년이 압도적으로 크다.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SNS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젊은 층 사이에서 MB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아마 복합적일 것이다. 50대 이상의 투표율은 어느 선거에서건 별다른 반동 없이 지속적으로 감소 중이다. 정동영의 말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 지금 20~30대 투표율의 급속한 상승은 2~3년 사이의 결과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추세일지는 알 수 없다. 20~40대는 상황에 따라 투표율이 크게 달라지며, 지금의 경향은 투표를 해야 ‘개념인’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인증샷을 올리면서, 놀이처럼 투표를 하고 유행처럼 투표를 한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분명히 SNS이다. ‘나는 투표했다’라는 과시를 할 수 있으니까. 투표를 하는 것이 촌스럽고, 유치한 것이 되는 분위기라면 이들의 투표율은 낮아질 수 있다. 하기야 이런 여론을 주도하는 사회지도층(대중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들이 계속 투표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겠지만.


짐작해보건대 아마 내년 총선은 60~65퍼센트 사이의 투표율일 것 같고, 대선은 70~75퍼센트 사이일 것 같다.



서울시장 선거는 어쨌든 SNS 여론이 강력히 지지한 박원순이 당선됐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재보궐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결과도 거의 다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SNS라는 공간은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RT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비슷한 생각들이 확장되고 폭발력을 갖는다. 대단한 집중성을 보이지만 너무 비슷한 생각끼리만 유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SNS는 새롭게 나타난 시민사회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역시 공간의 하나, 혹은 시민사회의 한 측면일 뿐이다. 새로운 공간은 대체로 ‘진보’가 먼저 선점하나, 곧이어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고 혼탁해진다. 이 뉴미디어가 현재 이것들을 찬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의 순기능을 할지는 알 수 없다.



과거 노무현 정권은 지지자들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이명박 정권은 그 반대자들에게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다. 환멸한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간다. 물론, 보수세력의 지지자들은 언제나 거의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세력의 지지자들이 분노하게 됐을 때 투표율이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심증을 세워본다. 환멸이 극에 달한 17대 대선과 08년 총선의 낮은 투표율, 탄핵 역풍이 분 04년, 작년의 지방선거와 최근에 벌어진 두 건의 재보궐 선거에서 상승한 투표율을 그 반증으로 생각해본다.



02년도 대선서부터 지금까지 20대 후반의 투표율이 가장 낮았다.(20대 초반보다도) 최근 다른 세대와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가장 낮은 수치다. 이번 재보궐은 아직 통계가 안 나왔지만 아마도 추세는 비슷할 것 같다. 02년도의 20대 후반은 지금은 3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의 투표율이 낮은 것은 그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구조적인 원인일 수 있다. 예컨대 취업준비와 사회 진출 등으로 생활이 가장 바쁜 시기가 그때라서 투표율이 낮을 수도 있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투표도 여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증거들이 여럿 있다. 투표율은 부유층이 더 높고 빈곤층은 낮다. 강남3구의 투표율이 높은 것은 그들이 투표할 여유가 가장 많아서일 수도 있다. 빈곤층이 자신의 이익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투표에 신경 쓸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이다. 선거일에도 상관없이 편의점에서 일해야 하는 알바생이나 택배기사가 투표할 수 있겠는가? 또 노년층의 투표율 감소는 증가하는 노인 빈곤과 관계가 있을까? 양극화에 따라서 투표율 분화 역시 일어날까? 이것도 조사해볼 만한 주제 같다.



이명박 정권 이후 정치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시민사회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고 긍정적이다. 삼삼오오 모이는 여러 형태의 시민 모임들도 늘어난 것 같다. ‘깨어 있고자’ 하는, ‘의식 있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의식의 양극화랄까, 여전히 관심 없을뿐더러 반동적이기까지 한 사람들과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 꼭 투표합시다!’ 이런 사람들 사이의 갭이 커진 것 같다. ‘좌빨들 ㅋㅋㅋ’ ‘슨상님 ㅋㅋ’ 하며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이 한나라당 알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한편으로 정치에 관심 있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실제로 정치 구도는 더 단순해졌다. 좌빨 아니면 수꼴이라는 편가르기가 심해지고,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꽃피기보다는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모호한 이분법이 정치 판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 ‘상식인’들을 분열시킬 수 있는 주제들(FTA, 원자력, 구조조정,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 주한미군, 낙태, 동성애 등)은 ‘일단’ 잠복해 있다. 이 분위기를 이해하면서도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가 없는 제도에서 양당제로의 수렴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런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단순한 투표율 제고를 넘어 정치적 다양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로 보인다.


그녀가 크레인 위에 있다- 자본과 인간의 삶

그녀가 크레인 위에 있다. 김진숙. 쉰둘의 여성노동자.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었으며 20년을 해고노동자로 살아온 그녀가 200일을 넘게 크레인 위에 있다. 뜨거운 폭염으로 크레인이 달궈질 때도 무시무시한 폭우가 쏟아질 때도 그녀는 크레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녀의 투쟁의 자리이며, 삶의 자리이고, 동지들이 숨을 거둔 죽음의 자리이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가 서 있는 85호 크레인은, 과연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 한진중공업이 행한 400여 명의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기 위해, 김진숙과 10여 명의 노동자들은 크레인에 버티고 서 있다. 노조 집행부는 이미 사측과 타협하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음에도, 그녀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포기하지 않고 있다.



김주익과 김진숙, 8년의 시간과 똑같은 이유


현재 '희망 버스'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야기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농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 그녀가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에 8년 전 김주익이라는 또 다른 노동자가 지금과 똑같은 이유로 올라가 있었다. 600여 명의 정리해고와 노조 탄압에 반대하며 싸움을 이어가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지금과는 달리 많이 알려지지 못한 그 투쟁은 이른바 운동권들 사이에서만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 크레인 위에 올라간 지 129일째인 어느 새벽, 그는 크레인 운전석 안에서 스스로의 목을 맸다. 김주익. 한 사람의 노동자이자 한 가족의 가장은 그렇게 '열사'가 되었다. 나 역시 2003년 어느 때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는 대자보를 학교에서 본 기억이 새록하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 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준엽아. 혜민아. 준하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적어보는 이름이구나.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 바란다.


그리고 여보.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서야 불러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칭이 되었네. 그동안 시킨 고생이 모자라서 더 큰 고생을 남기고 가게 되어서 미안해. 하지만 당신은 강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잘 해주리라 믿어. 그래서 조금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애.

이제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막내 누나를 만날 수 있을 꺼야. 그럼 모두 안녕."



김주익은 아이들에게 '힐리스'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지막까지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리고 그 후에 아버지를 대신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준 사람이 있다. 어느 잘난 부자나 자선사업가, 정치인이 아닌, 그와 똑같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이는 다른 동료들과 19만 3천 원을 모아 세 아이에거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했다. 그이가 바로 지금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이다. 부자도 정치인도 김주익을 외면하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외면했지만, 역시 잘날 것 없는 노동자인 그이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 후 그녀는 김주익과 똑같은 이유로 크레인 위에 올랐다. 그러나 "김주익 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겠다"고 말하며 반드시 승리하여 살아내려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자본과 인간의 삶

8년 전 김주익이 죽은 것도(그리고 김주익이 죽은 지 15일 후에 곽재규라는 또 한 분의 노동자가 투신자살을 했다), 그리고 김진숙이 지금 크레인 위에 있는 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동일하다. 정리해고. 그들의 싸움은 자신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폐기하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이다. 한진중공업이 1989년 영도 조선소를 인수한 이후 그곳의 노동자는 3200명에서 현재 670명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자연적 감소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는 수백 명을 한꺼번에 짜르는 정리해고가 있었고, 그에 대항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김주익과 곽재규는 그 투쟁에서 목숨을 버렸고, 김진숙은 200일 넘게 크레인 위에 버티고 있다.


한진중공업이 실행한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 내용은 이미 여러 곳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더 말할 필요도 없다(간단히 알고 싶다면 이곳을 참조). 그리고 사실 부당하든 부당하지 않든(혹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 사회에서 모든 정리해고는 해고당하는 노동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사회적 악행이다. 재작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는 분명 회사가 망하게 될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라도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절절한 진실이다. 실제로 그때 이후 15명의 해고 노동자가 자살과 여타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기업에, 또는 자본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으며, 자본으로부터 외면 혹은 버림받을 때는 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받는다.


그렇다, 이게 중요하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시스템의 핵심은 무엇보다 노동의 상품화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으며, 그것을 자본(기업)이 사줘야만 생계를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기업)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기업가들이 자신 있게 주장하듯, 기업은 고용창출을 해서 사회에 기여하며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기업(자본) 활동이 활발할 때 그 사회의 절대적 풍요도 증가하며, 기업(자본) 활동이 부진하다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의 생계는 자본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자본가이며, 더 크게 보자면 이른바 시장의 논리이다. 때문에 경기변동이나 해당 자본의 투자 방향 변화, 또는 한진중공업의 사례처럼 사업의 해외이전 같은 외부적 원인으로 인해 그 자본에 의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한꺼번에 출렁인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그 노동자들이 사는 사회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은 자본에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바로 그 자본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그 결과는 무엇인가? 삶의 지독한 유동성, 불안정성, 인간관계의 피폐화와 소외, 인간의 도구화. 그렇게 해서 인간의 삶은 '악마의 맷돌'에 갈려버린다.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본, 노동자, 국가- 신성한 삼위일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이어진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금융 위기로 미국 금융 시장은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미국 정부는 수천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여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금융 회사들을 살려냈다. 미국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금융시장 호황으로 인한 이익을 맘껏 향유하며 수백수천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시장의 부실을 예측하지 못하고 거품을 키워온 당사자들을 세금으로 구제한다? 게다가 그들은 금융 위기에도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겼다. 미국인들은 이런 도덕적 해이에 분노하며 구제금융을 실시한 미 의회와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했다. 경제위기의 주범을 국가가 살려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런 항의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존재한다. 브레이크 없는 금융자유화를 추구하며 탐욕을 충족시켜온 금융자본에 위기에 대한 지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Too Big to Fail. 그들은 망하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 컸고 사회 전체에 너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을 망하게 되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금융시장이 붕괴될 게 뻔했고, 그 피해는 그융투기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그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파국은 막아야 했다.


비슷한 상황을 한국도 경험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직접적인 원인 고리 중 하나는 기업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며 끌어쓴 돈을 갚지 못하며 일어난 연쇄 부도 사태였다. 신용경색 상태에 이른 많은 기업들과 그들에게 무리한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고 그들을 망하게 한다는 건 한국 경제사회의 파국을 뜻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한 것은 무엇이었나? 수조 원의 세금을 구제금융으로 지급한 정부, 그리고 그 세금을 내고 심지어 금모으기 운동까지 한 국민. 즉 전체 사회였다. 망할 기업은 망했지만 살아난 기업은 체질개선을 한 덕에 이후 더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1997년 이전의 삼성, LG, 현대 등과 그 10년 후의 그들은 위상이 전혀 다르다. 한국 안에서만 놀던 그들은 지금은 세계 유수의 기업이다. 그러나 그 성장의 과실은 전체 사회에 분배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됐다.


이상의 사례들은 마르크스의 지적을 확인해준다. 자본이 거대화, 고도화될수록 그것이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진다. 즉, '자본의 사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은 여전히 사적 소유물로서 그 자본을 소유한 개인(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다. 그 개인(들)의 판단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전체 사회가 떠안고 해결하지만, 반면에 자본이 거둔 이득이 전체 사회에 반드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른바 '피해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라는 구절은 이런 모순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모순으로 인해 경제는 격동하고 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고 판단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 경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의 발달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다.



비록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마르크스의 제안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철도나 도로, 전기, 수도 같은 특정 자본(생산수단)은 국가가 소유하며, 사적 자본도 일정 정도 통제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국가와 자본이 결합한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을 관리해야 할 국가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자본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밖에 없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시스템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한 것에도 분명 진실이 담겨 있다. 자본의 활동이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려는 것이 그 시스템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GM의 회장은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진실성 여부에 어떻든, 당시의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런 경제 시스템을 추구하려 했다. 국가의 주도 아래 자본과 노동의 이해 관계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 시스템의 목적이었다.

세계화된 자본의 시대


고도로 발달하고 거대해진 자본은 사회 전체에,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소수의 손에서만 맡겨서는 안 되며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자본의 사정으로 사업이 중지되고 수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사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명백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고 명백히 나와 있는바, 그런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까? 자본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공동 소유로 나간다고 해서 자본이 자동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하는 방향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사용을 민주주의적으로(혹은 공동체적으로) 결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한계가 있는 한 인간(그리고 인간의 모임)이 결코 '사회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을 알 수 없으며, 자본의 사용을 '자유시장'이라는 기구에 맡기는 것이 유일하게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자동으로 결정되는 가격과 이윤이 사회를 저절로 이상적인 방향으로 굴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설령 시장의 작동이 문제를 일으키더라도(마르크스가 말한 사적 소유의 모순 같은),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개선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자본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시장 이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맡겨라! 자본의 사적 소유와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이 아무리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신자유주의는 말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실패의 길을 걸으면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세계 각국 경제 정책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점차 줄어들고, 시장질서는 침해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존재가 됐다. 여기에는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교통과 통신이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면서, 특히 인터넷으로 인해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면서, 자본의 이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자본은 국가 단위를 훌쩍 넘었으며,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국가 간 이동도 (특히 금융 영역에서)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글로벌한 세계 시장이다.


다시, 인간의 삶과 자본으로


길게 돌아왔지만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자, 오늘날 글러벌한 세계 시장은 신자유주의의 약속처럼 최선의 결과를 내놓고 있을까? 불행히도, 그리고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의 자유로운 사용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크레인 위에 올라간 김진숙은 온몸으로 그 사실을 절절히 외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여전히 인간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계속해서 자본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아직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는 바는, 비록 우리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자본의 보편적 사용법은 알지 못하더라도, 단기적이거나 특수한 국면에서는 그 사용법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시 상황이나 개발도상국의 경제 부흥 시기에는 계획경제가 시장경제가 내놓지 못하는 훌륭한 성과를 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장하준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경제 선진국이 초기에 계획 경제 정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걸 잘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즉, 시장에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교조적인 주장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의 상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련이 채택한 일국 사회주의 경제는 체제 경쟁에서 처절히 패배하고, 오히려 민중들을 착취하면서 실패로 들어갔다. 더욱이 오늘날의 '글로벌한 세계' 시장은 각 국가들이 20세기 초중반에 택했던 국가 주도의 자본과 노동의 타협(북유럽의 복지 국가로 대표되는)이라는 해결책을 점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장기적으로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고 생산을 해외로 돌릴 계획이다. 지금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는 일감이 없어 정리해고를 하지만, 필리핀에 새로 지은 수빅 조선소에서는 과로사로 노동자가 죽어나갈 정도로 일감이 몰려 있다.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 더 싼 노동력을 찾아나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달리 말하면,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정리해고되고 김진숙 씨가 이에 저항하며 크레인 위에 올라간 것은 이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본의 운동으로 인간의 삶이 흔들거리는 일은 오늘날 국제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자본이 세계화되면서 국민국가는 심각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민을 책임져온 국민국가는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본에 개입해왔지만 이제는 그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초국적 자본은 한 나라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은 왠만한 국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은 국민의 전반적 삶을 책임지는 국민국가의 책무를 면제해주고 있다. 이제 각자의 삶은 각자가 꾸려가는 것이며, 국가는 단순히 질서의 관리자(테러나 범죄에 대응하는)일 뿐이라는 새로운 국가관이 출현했다. 그렇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문제처럼, 그리고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문제처럼, 자본의 국제적 운동은 사회 공동체에 점차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고 있다. 글로벌한 세계 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누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지는 아직까지 미궁에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요구하며 김진숙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


나로서는 비현실적인 두 가지 해결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는 세계화된 자본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적인 연합 내지 기구. 그러나 G20 회의에서도 보듯, 한 국가를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각국의 이익을 최우선할 뿐 공동의 행동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한다. EU조차도 최근의 위기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길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 정부가 탄생하지 않는 한 이런 연합 내지 기구는 계속 삐걱거릴 것이다. 둘째는 자본의 국제적 운동에 대응하는 국제적 노동, 사회운동의 발달. 전자가 '위'로부터의 대응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대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비해 노동은 턱없이 한 나라, 한 조합 안에 갇혀 있다. 노동운동의 국제적 조직화는 난망하기 이를 데 없으며, 현재로서는 거의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세계화된 자본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그 필요성은 더욱 대두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크레인 위에 있다. 사회의, 세계의 답을 요구하며 그 위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노동자가 계속해 답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크레인 위에 올라갈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를 수는 없다.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한다.


남의 감동에 시비를 걸지는 말자.

나는 제발 평창 동계올림픽이 유치되지 않길 바랐던 사람이고, 올림픽의 경제적 효과가 몇 조라는 소리는 증거도 증명도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김주하 아나운서의 눈물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발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지 말자. 누군가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애환에,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의 사정에 눈물 흘린다면 분명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걸 강요할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사회적 의식이 없다고, '깨어 있지' 않다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 난 우월의식을 본다. 무엇이 더 옳고 바람직한 행위인지 함부로 규정하는 우월의식. 국가주의 못지 않게 그런 우월의식도 나는 싫다.

국가주의를 함부로 들먹거리지 말자. 마치 자기는 월드컵 때 한 번도 환호를 질러보지 않은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감동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자. 여전히 많은 사람들(아마도 70~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개최와 그곳에서의 좋은 성적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공영방송의 아나운서가 그 기쁨을 함께 표현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보도했더라도 그 사람들은 지금처럼 국가주의 운운했을지 난 좀 의문이 든다.(물론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이 뭐라고는 했겠지만) 

우리는 왜 포르노를 볼까?

어느날 오후에 나는 우연히 소파 밑에 처 박힌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발견했다. 아니, 우연이 아니었다. 며칠 새 형의 거동으로 보아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이곳 저곳을 뒤지다 제목 없는 그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러자 기대한, 아니 기대를 넘어선 광경이 화면에 나왔다. 전라 상태의 금발 여성은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는 구멍으로 굵은 남성의 성기가 드나들었다. 그녀는 입에 또 다른 남성의 성기를 물고 있었다. 몸은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아래로 늘어진 탐스러운 유방이 흔들렸다. 달착지근한 교성이 울려퍼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나는 정신없이 화면에 빠져들었다. 그 동물적인 행위가 나를 꼼짝 못할 정도로 매혹시켰다. 알 수 없는 고양감과 흥분이 몸을 휘감았고,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환락과 쾌감, 강렬한 자극과 충격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내 첫 포르노의 추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우리는 왜 포르노를 볼까?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왜 포르노를 보고 거기에 흥분을 할까? 인간의 성적 습관의 특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동성끼리 성교를 하고, 훔쳐보고 노출하는 것에 흥분하며, 파트너를 교환하고 난교를 즐기고, 혹은 때리고 맞으면서 쾌락을 느끼고, 신체의 일부 또는 소품의 하나에 집착하며, 때로는 분뇨를 먹거나 시체를 사랑하고, 심지어는 짐승과도 성교를 한다. 그에 비하면 포르노를 보는 것쯤은 평범하고 건전해 보인다.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보고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르노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섹스: 거울 뉴런의 대리만족


인간은, 적어도 남성은, 누구나 섹스를 좋아한다.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종족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명령이며,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일이다. 그렇지만 포르노는 섹스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섹스다. 다른 사람이 섹스하는 것을 본다고 도움 되는 것은 없다.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하고, 자위로 이어졌을 때는 약간의 체력과 정액을 낭비한다. 포르노를 통해 성행위를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랬다간 역효과만 날 가능성이 더 높다. 생물학적으로 포르노를 보는 행위는 완전히 무의미한 낭비이다.

차라리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를 보고 흥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적합한 짝짓기 상대를 만났을 때 흥분하도록 진화했고, 그것이 사진이나 영상일 때도 인간의 본성은 속아넘어가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저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서 흥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여성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성교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흥분한다. 이는 철저히 인간만이 취하는 행동이다. 인간은 어째서 타인의 섹스를 보고 흥분하는 것일까?



포르노를 보는 인간의 습성이 기묘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비단 포르노에서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다른 이의 행동과 감정을 간접 경험한다.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보고서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 된 것인 양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만이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거울 뉴런'의 작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울 뉴런은 동물이 다른 개체의 행동을 관찰할 때 활동하는 신경세포이다. 이 신경세포는 다른 개체의 행동을 '거울처럼' 따라하기 때문에 관찰자는 마치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고 한다. 거울 뉴런은 영장류에서도 발견되며, 학습과 모방에 매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역지사지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도 여기서 유래하며, 인간 특유의 간접 체험도 거울 뉴런의 작용 덕분으로 보인다.



이를 포르노에 적용하면 이런 설명이 된다. 인간(남자)이 포르노에 나오는 타인의 섹스 장면을 볼 때 거울 뉴런이 작동해 마치 자기가 섹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렇다면 인간은 포르노를 통해 평소에 경험할 수 없는 멋진 상대와의 환상적인 섹스를 간접적으로 경험하여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추정은 별 무리가 없다. 우리가 포르노를 즐겨보며 흥분하는 이유는 이렇게 밝혀진 것 같다.



그룹섹스와 흑인물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포르노에서 구하는 것은 정말로 단순한 대리만족일까? 포르노에는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꿈꾸는 섹스만이 나오지 않는다. 여성1명에 남성 2명으로 구성된 3some신을 떠올려보자. 이런 그룹 섹스는 포르노에서 흔하게 등장하지만 그 포르노를 보는 남성들은 정말 현실에서 그런 섹스를 하길 원할까? 간간이 그러한 그룹 섹스를 시도하는 과감한 남녀의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분명히 일반적이지는 않다. 자신과 자신의 애인과 또 다른 타인이 함께 섹스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성의 독점욕을 생각해봤을 때 전혀 관계없는 여성이라도 타인과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포르노에는 여성 1인에 남성 다수의 성행위가 매우 자주 등장하며, 남성이 십수 명에 달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런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은 그 십수 명 중 한 명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런 집단 성행위에 대한 욕망을 포르노를 통해 대리 만족하는 것일까?



남성들이 포르노에서 단순한 대리만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몇몇 포르노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봤을 때도 드러난다. 포르노에서 즐겨 사용되는 소재로 '흑인물'이 있다. 백인 여성 또는 황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섹스를 담는 장르이다. 그 포르노를 보며 흥분하는 (흑인이 아닌) 남성들은 자신들이 흑인이 되어 여성과 섹스를 한다고 상상하기에 흥분하는 것일까? 또한 중년의 못생긴 남성이나 노년의 남성이 즐겨 포르노의 남자 배우로 등장한다. 그럴 때 그 포르노를 보는 남성들은 자신이 중년의 추한 남자가 되어 여성을 범한다고 상상을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포르노에서 여성은 미인이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외모적으로 보면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다. 대개 포르노에서 구현하는 남과 여의 성적 결합은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결합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이 관념적으로 하등하다고 여겨지는 흑인이나 추남과 섹스를 하는 장면이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관념적으로 하등하다고 여겨지는 상대와 아름다운 여성이 섹스를 하는 장면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남자도 이 여자와 섹스를 하는 데 당신이라고 못할 것 없다." 여성이 둘, 셋 그리고 그 이상의 수의 남성과 섹스를 하는 장면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렇게 많은 남성을 받아들이는 여성은 당신 역시 받아들일 것이다." 포르노를 보는 남성들은 단순히 섹스 장면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 아니다. 포르노는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구현하며,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 남성들은 흥분한다.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여타 인격적 요소는 제거되고 오로지 섹스만을 위한 존재이다. 그녀들은 남성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철저히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봉사한다. 일반적으로 포르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자들은 당신에게 열려 있다. 당신은 얼마든지 이 여성들을 마음대로 범할 수 있다."



여성, 암컷, 암캐

거의 모든 남성은 섹스를 원한다. 언제 어디서건 남성은 기회만 된다면 어떤 여성과도(그녀가 매력적이라면) 섹스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섹스는 상대가 필요한 행위이며, 두 인격 간의 교감이 필요한 행위다. 남성이 섹스까지 가기 위한 길은 멀고 험하다. 여성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얻고 확신을 주었을 때 남성은 그 여성과 섹스를 할 수 있다. 연애는 상당한 감정 노동이 필요한 행위이며, 그것은 섹스를 원하는 성급한 남성의 본능에게는 짜증나고 번거로운 일이다. 원나잇스탠드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오늘날이지만, 어쨌든 남성은 여성을 꼬시고 비위를 맞춰야 섹스를 할 수 있다. 어쨌든 남성은 결코 자기 욕망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너무도 위험 부담이 따르는 선택이다.



물론 이런 번거로운 감정 노동의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남성의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이 있다. 매춘은 상대를 꼬시고 어쩌고 하는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곧장 상대 여성과 섹스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매춘은 돈으로 섹스로 가는 직통 입장권을 사는 것과 같다. 매춘의 한 가지 문제는 '돈'이라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필요하며 성적 서비스를 구매하는 남성 역시도 성판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지불하는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성판매 여성이 구사하는 온갖 교태와 교성은 자신이 지불한 돈에 대한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으로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포르노를 보자. 포르노에서 구현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챙기려는 어려운 감정 노동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없으며, 잘생길 필요도 없고 자상할 필요도 없다. 포르노 속의 여성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 그 자체, 적나라하게 말하면 남성의 자지일뿐이다. 포르노 속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섹스를 원하며, 그저 박아주기만 하면 만족한다. 철저히 성적 본능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녀는 남성이 원하는 완벽한 여성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여성의 인간성이 대부분 제거된 모습이며, 흔히 말하듯 여성을 단순한 '암컷'으로 전락시킨다.



포르노의 이런 측면이 가장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은 수간물이다. 이 장르에서 여성은 실제로 개 또는 말과 성교를 하며, 문자 그대로 '암캐'가 된다. 여기서 여성비하는 극에 달하며, 여성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여성을 동물과의 섹스에도 즐거워하는 존재로 전락시키며 수간물은 남성의 욕망을 만족시킨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아닐지라도 포르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여성의 철저한 비인간화와 순전한 성적 동물, 혹은 '암캐'로의 전환이다. 어떤 남성이건, 남성이기만 하면, 아니 '수컷'이기만 하며 포르노 속의 그녀를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다.



오직 여성만?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포르노는 아직 여성만을 비하하는 것일까? 포르노 속에서 여성은 다른 모든 인격적 측면은 거세되고 오로지 섹스에 탐닉하는 존재로 나온다. 여성은 단지 섹스만을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성은 어떤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많은 경우 포르노에서 남성은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다. 등장하는 것은 남성의 성기일 뿐이다. 포르노 속 남성의 가장 주요한 가치는 그의 성기 크기이다. 여성의 경우 외모와 몸매, 최소한도의 성격적 측면이 드러나지만, 남성은 그저 성기로 치환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성=자지가 되면서 더욱 심한 인간비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비록 그것이 많은 남성이 바라는 것일는지는 몰라도.



포르노가 구현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섹스가 아니며, 그것이 목적으로 하는 것도 단순한 대리만족이 아니다. 섹스를 감정노동이 필요한 인간적 행위가 아닌 단순한 성적 결합으로 묘사하고,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섹스에 열광하는 암컷으로 그리면서 남성의 무자비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포르노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남성 역시 인간이 아닌 단순한 수컷에 불과하게 된다. 포르노가 결국 남녀 모두에 대한 인간비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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